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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본 칼럼

유럽 왕실의 의미와 역할


Queen Elizabeth, 1953


영국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 중 왕실이 있는 곳이 많다. 한국에선 유럽의 왕 제도에 대해 그냥 전통에 따른 요식 행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우리는 유럽의 왕실에서 역사와 정치의 근본을 생각할 수 있다. 왕실의 의미와 역할은 다음과 같다.


1. 전통의 수호자

각 국가마다 좋은 전통을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과거 역사를 무로 돌리지 않아야 한다는 합의가 있다면, 유럽 왕실의 존재의의를 쉽게 부정하긴 힘들다. 유럽 왕실은 전통 관련 여러가지 유무형, 특히 무형의 전통을 보존한다. 에드워드 기번은 전통에 대한 무지를 경멸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왕실의 전통은 어떻게 보존되고 있을까? 이명박이 광화문 파헤쳐도 별 문제의식 없다. 좌우파 정치 문제가 아니다. 전통에 대한 개념 자체도 없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다.

2. 국내 정치의 조율자

어느 국민이건 특정 정치성향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늘 '국민통합'을 강조한다. 그런데 국민통합이 말로만 되나? 그럴만한 권위가 있는 사람이 외쳐야 한다. 박정희, 김대중, 박근혜 모두 진정한 국민통합은 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유럽의 왕실은 정치에 치우치지 않고 그런 역할을 한다. 실지로 현실정치 지도자들 사이에서 정치현안 관련 조율을 하기도 한다.

3. 인문학 지도자, 정신적 지도자

정치지도자 외에 한 국가의 정신적 지도자, 그룹은 필요하다. 종교가 그것을 대신할 순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유럽 왕실은 기초 교양교육을 철저히 수행한다. 그리고 정치편향을 경계하며 종종 시대를 짚어주기도 한다. 인문학 지도자를 선거로 뽑을 수도 없다. 유명한 작가나 학자라도 그 역할을 못한다. 유럽 왕실은 그 역할을 한다.

4. 국가의 정서적 지도자

유럽의 왕들에게 국민들은 친숙함을 느낀다. 스포츠 행사나 자연재해 때 왕들이 국민을 성원하고 위로한다. 우리나라는 그런 부분이 정치적으로 오염될 수 밖에 없고 섞여 있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왕이나 여왕처럼 생각하는 국민들도 많다. 우리나라는 시대와 전통이 뒤죽박죽이고 순수하게 정서적인 위로는 존재할 수 없다. 유럽의 왕실전통은 그것을 한다. 인민의 비이성적인 정서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부분을 포지티브하게 흡수하는 것이 왕실의 역할 중 하나다. 포퓰리즘 정치에 오염되지 않고 국민의 권위에 대한 정서적인 욕구를 충족시킨다.

5. 강력한 외교관

국가에서 왕보다 더 강력한 외교관이 있을까. 미국이 북한에 구글 회장 보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외교관이 바로 유럽의 왕들이다. 외교에서 품위와 의전이 주요부분 아닌가. 게다가 유럽 왕실은 실무에서도 정식 외교관의 역량보다 떨어지는 게 없다는 것이 중평이다.

6. 왕도 민주주의 통제를 받는다

유럽 인민들은 왕실을 폐지하려면 할 수 있다. 국민투표 하면 된다. 하지만 유럽 좌파 10% 정도가 왕실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끔 제기할 뿐, 대개 왕실을 유지하는 것에 찬성한다. 그들이 제왕제 노예의식에 젖어 그러는 것이 아니다. 

왕 제도가 없는 한국보다 유럽 국민들의 정치의식 수준이 낮을까? 유럽의 왕실제도는 정치 관련 역사의 깊이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가 힘든 면이 있다. 하지만 유럽 왕실을 이해하려는 생각이 현실 정치의식을 더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 역사와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그리고 실용적인 면 등 모든 측면에서 그렇다. 

(by 이기본. 2015.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