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일본 우익청년 야마구치 오토야가 일본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를 칼로 찔러 살해하는 장면. 당시 야마구치는 열 일곱 살이었고 이 사건 후에 곧 감옥에서 자살했다. 이 사진은 당시 마이니치 신문 사진기자 나가오 야스시가 찍었던 것으로 그해 세계보도사진 대상을 받았다.
1.
한국에서 한때 '문화의 다양성', '상대주의' 바람이 불었다. 한가지 잣대로 사물을 평가하는 것은 폭력이 되기 십상이라는 깨달음은 그리 심오한 득도는 아니기 때문에 바람이 불만 하다. 하지만 바람은 곧 천박함을 뜻하기도 한다. 인류 역사를 통해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는 끊임없이 피를 흘리며 싸웠고 그 싸움을 통해 중도의 길을 모색했다. 하지만 인류역사를 통해 축적된 인문학적 소양이 절대 부족한 한국 같은 천박한 사회에서는 상대주의, 다양성, 관용(아참, 똘레랑스 바람도 불었었지.) 같은 진보적 가치도 가볍게만 보인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선 '반이슬람주의자'라고 하면 곧장 인종차별주의자 내지는 편협한 우파라고 연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주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문화에 대한 반발심리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고, '반이슬람'의 반反에 대한 즉흥적인 거부감 때문일 수도 있다. '이슬람을 왜 관용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일 것이다. 이런 생각은 그간 헐리우드 영화 등에서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을 괴물처럼 묘사해왔던 데 대한 반작용의 측면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인식의 발전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차원적인 생각은 '관용'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이다. 최소한 '반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관용'까지 생각하는 것이 상대주의를 거론하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태도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법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네 명까지는 공식적인 아내로 둘 수 있고, 혼전 성관계는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으며 여성은 운전을 할 수 없다. 대체적으로 그렇다. 즉 대표적인 인권탄압 사회가 이슬람 문화권이다. 대부분의 반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슬람의 '불관용'에 반대하는 것이다. 즉 반이슬람주의자들을 쉽게 꼴통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관용의 영원한 숙제가 나온다. "어디까지 관용할 것인가." 사실 '어디까지 관용할 것인가'가 논의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시민들이 사회의 '관용도'에 대해 고민한다는 말은 그 사회에 기본적으로 관용 정신이 깔려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2.
한국 사회는 아직 관용에 대한 기초적인 인식이 부족한 듯 하다. 서울 광화문 대로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치면 욕을 듣거나 심하면 사법처리될 수도 있다. 국가보안법 때문이기도 하지만 꼭 법이 아니더라도 우익 성향을 가진 사람이 시위자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고 시위자의 직장생활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리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런 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관용도 수준이 아닐까. 심지어 관용도라는 것은 수치적으로 측정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광화문 대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큰 소리로 얼마나 자주 김일성을 찬양하는 것을 참아낼 수 있느냐.
말이 나온 김에 두 가지 사건을 예로 들어 한국 사회의 '관용도'를 가늠해보자. 우선 강용석 전 의원의 '여자 아나운서 비하사건'을 보자. 강용석 전 의원이 아나운서 비하발언을 했다고 보도되고 난 뒤 한국의 여자 아나운서들이 서명까지 해가며 강용석 전 의원을 '집단모욕죄'로 고소했다. 당시 법원에서는 '집단모욕죄'를 실제로 적용했다. 한국이 얼마나 관용없는 사회인지를 대내외에 보여줬던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여타 선진국에서는 모욕죄는 말도 안 되고 명예훼손죄도 실질적으로 적용하지 않는 추세다. 역사의 상처가 깊어 유럽에선 불법이지만 미국에선 나찌를 옹호하는 발언도 곧장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용인하는 훈련이 되어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잘 참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례들이 한국에서 종종 인용되곤 했지만 '강용석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한국은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들고 싶은 사건은 유시민 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의 '애국가 발언 사건'이다. 유시민 전 대표가 통합진보당에서 국민의례 때 애국가를 생략하기도 했다는 것에 대해 고발성 발언을 했던 것. 유시민 전 대표는 그게 그렇게나 거슬렸던가. 당시 그는 국민과 대중을 핑계로 그런 발언을 했지만 실제로 국민들은 유시민 대표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진 거기에 대해 별 문제의식도 없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가 없어진 지가 언제며, 각종 공식 행사에서 민중가요가 애국가를 대신하기도 한 지가 언제며, 극장에서 애국가가 사라진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말이다. 이 사건을 통해 한국에선 정치인들이 종종 색깔론 포퓰리즘을 악용하여 사회 전반적인 관용도를 떨어뜨리고 있고 또 그런 시도가 충분히 먹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진보세력을 자처하던 유시민 같은 진보적이라는 정치인이 저 정도 수준이라는 점에서 우리사회가 얼마나 천박하고 폭력적인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유시민은 당시 자파였던 참여계의 부정선거 실상을 감추기 위해 여론 포퓰리즘을 동원했는데 그 비열함을 반성해야 한다. 그 누구보다 통진당 저질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혐오하는 내가 보기에도 당시 유시민은 선을 넘었다.)
3.
“나는 당신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말할 권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
볼테르가 했다고 전해지는 이 말은 일견 멋진 말 같지만 위 강용석 유시민 사례를 보면 실제 사회에서 적용하기가 녹록치 않음을 잘 알 수 있다. 관용이라는 말이 다소 모호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애써 분명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관용과 관련있다고 혼동하기 쉬운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추석 명절에 일어났던 층간소음 살인사건이다. 우선 층간소음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하자면 난 주로 소음 피해자의 편이다. '사람이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기가 어디 쉽겠는가, 오죽했으면...' 하는 생각인 것이다. 난 층간소음 문제는 엄밀히 따져서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관용은 주로 '참는 것'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관용은 본질적으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의 문제다. 층간소음은 일종의 피할 수 있는데 피하지 않고 저지르는 폭력의 문제다.
'관용'을 쉽게 이해하려면 우선 증오범죄부터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증오범죄(憎惡犯罪)란 소수인종이나 소수민족, 동성애자, 장애인·노인 등에게 이유없는 증오심을 갖고 테러를 가하는 범죄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이유없는'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증오범죄는 '차이'를 참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증오범죄는 개개인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쉬운 정치와 종교 분야까지 확대되고 있다. 아니 정치와 종교가 증오범죄의 출발이었고 배경이었다. 볼테르는 그의 논문 <관용에 관하여 Traite de la tolerence (1763)> 5장 '어떻게 관용을 수용할 수 있는가'에서 "종파가 많을수록 그 종파는 덜 위험해진다. 다양성이 종파를 부드럽게 만든다."라며 주로 정치와 종교를 거론했다. 역시나 '다양성을 인정하려는 노력'이 관용의 기본 정신인 것이다.
이 정도로 말해도 관용이라는 말의 의미가 잘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듯하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 생활에선 실천하기 힘든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관용정신이다. 그래서 좀 거칠더라도 관용정신을 쉽게 말하고자 한다. 관용정신이란 한마디로 '기분 나쁜 것, 자기를 욕하는 것을 참는 정신'이다. 이것은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 피해' 등과 늘 부딪히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다. 인터넷 악플에 의한 자살(?), 층간소음 분쟁 문제 등 용인할 수 있는 폭력과 자유의 정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렵다. 어렵지만 또 한 번 관용을 구체적으로 정의하려고 시도해보자면 '상대방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자신에 대한 모욕과 명예훼손을 최대한 참는 정신' 정도가 되겠다. 물론 이런 정의에도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사회 구성원들이 관용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그 과정 자체가 관용에 대한 최종 결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결론이라고 한 그 '과정 자체'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관용'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선 '불관용을 어디까지 관용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시기상조나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위에 예로 들었던 강용석, 유시민 사건을 통해 본 한국사회의 수준은 기초적인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논하기에도 벅차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by 이기본. 201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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