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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본 칼럼

[18세기] 일본 난학의 시작 《해체신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1543~1616)

 

일본의 조선 침략(1592~1598) 실패 직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7~1598)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1543~1616)가 정권을 잡았다. 도쿠가와는 정치 중심지를 교토에서 자신의 근거지였던 도쿄(東京)로 옮겼다. 이때(1603년)부터 1868년, 즉 에도 성이 메이지 정부군에 함락될 때까지를 ‘에도시대’ 또는 도쿠가와 시대(徳川時代)라고 한다. 일본이 길었던 쇄국 기간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한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데는 에도시대 난학(蘭學, 네덜란드 학문)의 역할이 컸다.

 

1600년 4월, 네덜란드의 리프데(Liefde)호가 일본 해안에 표류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네덜란드인 항해사 얀 요스텐과 영국인 항해장 윌리엄 애덤스를 에도로 초청해 영지를 내리고 바쿠후(幕府)의 외교고문으로 앉혀 일본이 그들의 본국과 통상할 수 있도록 했다. 에도 바쿠후 초기 많은 일본인들이 동남아 등으로 진출했다. 하지만 1632년의 ‘쇄국령’으로 해외 주재 일본인들의 귀국이 금지됐고, 1639년에는 일본의 ‘일본-유럽 혼혈인’들을 추방했다.

 

 

스기타 겐파쿠(杉田 玄白 1733~1817)

 

난학이 꽃을 피울 수 있었던 데는 8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 吉宗 1684~1751)의 역할이 컸다. 그는 쇄국 이후 두절된 서양문화를 장려한 군주였는데 휘하 유학자들에게 네덜란드어를 배우라고 명하기도 했다. 난학의 초창기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책이 스기타 겐파쿠(杉田 玄白 1733~1817)의 《난학사시》(蘭學事始)다. 그는 《해체신서》(解體新書)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스기타는 난학의 창시자라 할 만 하다.

 

 

《해체신서》(解體新書)

 

스기타는 의사였던 아버지가 네덜란드 의술에 관심을 보인 덕에 18살에 네덜란드 외과의를 자처하던 니시 켄테스의 제자로 들어간 뒤, 20대에 독립하고 병원을 차렸다. 1771년, 그는 네덜란드 상관장의 한 통역관이 지니고 있던 《타펠 아나토미 Tafel Anatomie》(독일인 쿨무스 A. Kulmus 원저의 네덜란드 책)의 해부도를 보게 된다. 스기타는 《난학사시》에서 ‘이 봄에 이 책을 손에 넣다니, 참으로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묘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난학이 꽃을 피우려나 보다.’라고 회상했다. 같은 해 스기타는 어느 수의사로부터 ‘해부 실습이 있으니 관심 있으면 참석하라’는 편지를 받고 역시 네덜란드 의학서에 빠져있던 의사 마에노 료타쿠에게 알렸다. 두 사람은 책의 해부도가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노도 키도 없는 배로 대항해에 오른 것’ 같이 막막하던 번역작업을 시작했다.

 

 

엄복(嚴復 옌푸 1853~1921)

 

1774년에 번역이 끝난 《해체신서》는 한문으로 번역되지 않은 서양 서적을 최초로 번역한 것이었다. 《해체신서》를 번역하던 중에 ‘신경’, ‘연골’, ‘동맥’ 같은, 오늘날에도 널리 쓰는 한자어 조어들이 생겼다. 20세기 초에 중국의 엄복(嚴復 옌푸 1853~1921)을 비롯한 학자들이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 애덤 스미스의《국부론》, 스토우 부인의《엉클 톰의 오두막》 등을 번역할 때 일본식 한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휘튼(H. Wheaton)의《만국공법》 같은 경우는 일본으로 들어갔다가 역수입된 책이었다. 당시 생겼던 번역어는 중국 고전에서 찾아냈던 ‘문명’, ‘문학’ 등과 일본이 발명했던 ‘과학’, ‘사회’ 등이 있다.

 

 

※ 참고 책, 자료

《편지로 읽는 세계사와타히키 히로시/ 김현영, 디오네, 2007

《이야기 일본사김희영 엮음, 청아출판사, 1987-1992

<동·서양의 근대화> 다큐멘터리, EBS,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