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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본 칼럼

[18세기] 해적 몰락

 

 

볼리비아의 포토시(Potosi)

 

16세기, 스페인의 코르테스(Hernan Cortez, 1485~1547)와 피사로(Francisco Pizarro, 1475~1541)가 각각 아스텍 제국과 잉카제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스페인은 볼리비아의 포토시(Potosi)에서 은을 채굴하여 1년에 두 차례 자국으로 운반했다. (1회 은 운반량의 가치는 지금 한화로 따지면 약 6천억 원 정도다.) 18세기 동안 유럽으로 들어갔던 은의 무게는 약 20만 톤에 달했다. 이 은은 당시 유럽의 주요 결제수단이었고 유럽의 자본 성립, 산업혁명에 큰 역할을 했다. (피사로가 2002년까지 스페인 지폐의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16~18세기의 포토시는 ‘엘도라도’였고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1605~1615)에서 포토시를 ‘부자나라’로 언급하기도 했다.

 

18세기의 서유럽 무역에서 아메리카는 아시아보다 비중이 더 컸다. 1713년부터 1792년까지 80년 동안 영국은 서인도제도에서 거의 1억 6천 2백만 파운드의 상품(대부분이 설탕)을 수입했다. 같은 기간 동안 인도와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은 1억 4백 만 파운드였다. 프랑스는 설탕 식민지들 가운데 가장 부유했던 산토도밍고(아이티)를 지배했다.

 

스페인은 프로테스탄트를 비롯한 침입자들이 아메리카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17세기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카리브 해 지역을 한창 식민화하던 중이었다. 영국은 세인트 키츠(1623), 카리브 섬 바베이도스(1628)와 몬세라트(1663), 안티구아(1632), 세인트 루시아(1663), 그리고 바하마 제도의 나소(1666), 버뮤다(1684)를 차례로 점령했다. 프랑스는 1635년 카리브 해의 마티니크 섬, 과델루프 섬을 차지했고, 영국과 얼마간 분쟁을 벌인 끝에 1667년에 남아메리카의 북쪽 해안에 있는 프랑스 기아나를 손에 넣었다. 네덜란드는 퀴라소(1634)와 아루바(1647)를 점령하면서 노예무역 시장을 추가로 얻었는데, 그곳은 오늘날 네덜란드의 안틸레스 제도에 속한다.

 

 

 

윌리엄 키드(William Kidd, 1645~1701)

 

중남미의 물자들이 대서양을 건너기 위해선 카리브 해를 거쳐야 한다. 당시 카리브 해적들은 이런 운반선들을 노렸다. 무법자들은 17세기 말과 18세기 초반에 전성기를 누리다 차츰 바다에서 사라졌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윌리엄 키드(William Kidd, 1645~1701)는 어린 나이에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로 진출하여 무역업자 겸 사나포(私拿捕) 업자로 성공했다. 키드는 영국과 프랑스의 첫 식민지 쟁탈전쟁인 ‘윌리엄 왕 전쟁’(1689~1697) 동안 활약 하여 윌리엄 3세로부터 나포 면허장을 받았다. 1695년 키드는 뉴욕에서 선원들을 모집한 뒤 마다가스카르로 가서 무굴제국 황제 소속의 선박들을 공격하기도 했고, 1698년에는 프랑스 왕가의 보호 하에 항해 중이던 미국 선박을 나포했다. 영국 해군은 과거에는 눈 감아 주었을 키드의 약탈을 갑자기 ‘순수한’ 해적행위로 규정했다. 1699년 영국의 뉴욕 총통은 키드를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키드는 1701년 런던 부두에서 교수형 당했다.

 

 

 에드워드 티치(Edward Teach, 1680~1718)

 

18세기 초에 가장 악명 높았던 해적은 에드워드 티치(Edward Teach, 1680~1718)였다.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등장인물인 에드워드 뉴게이트와 마샬 D. 티치는 그의 이름을 땄다.) 티치는 대포나 수류탄에 불을 붙일 때 자신의 빽빽한 수염을 이용했던 기괴한 행동으로 ‘검은 수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다니엘 디포(1660~1731)는 검은 수염을 ‘지옥에서 온 미치광이’라고 했는데, 검은 수염은 희생자에게 스스로의 귀를 먹게 하는 등의 잔혹한 고문을 즐겼고, 찰스 존슨의 《가장 악명 높은 해적들의 강도질과 살육의 역사》(1724)에 따르면 별 이유도 없이 부하 선원들을 시켜 그의 14번째 아내였던 16세의 소녀를 집단 강간 하도록 하기도 했다고 한다. 1717년 티치는 영국 상선을 나포하고, 자신을 체포하러 온 왕립 해군 전함을 격퇴했다. 또 자메이카에서 온 범선을 나포하여 휘하 장교 중 이스라엘 핸즈(Israel Hands, 로버트 스티븐슨이 《보물섬》에 나오는 해적 이름으로 빌려 썼다.)를 선장으로 임명한 뒤 자기 휘하의 해적선으로 삼았다. 1718년 검은 수염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을 봉쇄하고 주민들의 몸값을 성공적으로 뜯어낸 일도 있었는데, 그가 해적질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부패한 식민지 총독들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해적들에게 적대감을 가졌던 버지니아 총독 알렉산더 스포츠우드(1676~1740)의 부하 로버트 메이너드 소령이 1718년 11월 22일, 선상 혈투 끝에 검은 수염을 죽였다.

 

18세기 초 해적 소탕의 일등공신은 1718년 바하마 제도 총독으로 부임한 우즈 로저스(1679(?)~1732)였다. 1719년 그는 이천 명이 넘는 해적들의 본거지인 나소에 도착해 체계를 갖춘 정부를 세우고 해적들을 제압했다. 로저스는 원래 상인이었는데 해적들에게 큰 피해를 당하자 그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1708년부터 자신도 해적질을 했다. 그는 주로 스페인 보물선을 노렸고, 이전에 그가 입은 손실을 만회하고도 남을 이득을 챙겼다. 그는 칠레 해안을 항해하다 후안 페르난데스 섬에 4년간 표류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선원 알렉산더 셀커크를 구조하기도 했는데, 셀커크는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1719)의 실제 모델인 것으로 알려졌다.

 

 

 

찰스 베인(Charles Vane, 1680(?)~1721)

 

로저스는 총독으로서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우선 해적들에게 국왕의 사면을 제의했다. 로저스의 단호함을 아는 많은 해적들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다른 바다로 갔는데 찰스 베인(Charles Vane, 1680(?)~1721)은 개의치 않고 카리브 해에서 해적질을 계속 했다. 베인도 베인도 로저스처럼 처음엔 평범한 사략선(私掠船)의 선장이었으나, 1715년 플로리다 해안에서 좌초한 스페인 운반선을 기습하여 막대한 은을 약탈한 뒤 유명한 해적이 되었다. 그는 버뮤다에서 해적질 뿐 아니라 선원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1718년 로저스는 베인에게 ‘용서’를 제안했지만 베인은 이를 거절하고 프랑스 선박을 공격했다. 같은 해 그는 ‘검은 수염’과 함께 항구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아프리카 노예선들을 공격하기도 했고 찰스턴에서 많은 선박들을 나포했다. 1720년 결국 베인은 체포됐고 자메이카에서 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다가 교수형 당했다. 시체는 해적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포트 로얄 항구의 입구에 매달렸다.

 

해적들이 열세에 몰리기 시작했던 계기는 1684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독일에서 맺었던 라티스본 조약(the Treaty of Ratisbon)부터다. 두 나라는 오랜 적대감을 자제하고 바다의 질서를 위해 카리브 해적들을 통제하기로 했다. 영국도 사나포 업자들에게 더 이상 면허장을 내주지 않았다. 이에 카리브 해적들은 입장을 바꿔 ‘해적 사냥꾼’이 되기도 했고, 조약의 관할권인 카리브 해를 떠나 아프리카, 인도양, 태평양으로 진출했다. 떠난 이들은 서아프리카의 해변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곳에서는 인간 사냥꾼, 혹은 부족의 족장들이 팔아넘긴 아프리카 원주민 노예들(‘검은 황금’)을 거래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또 인도양에선 비단, 보석, 상아, 후추 그리고 육두구(nutmeg)나 계피 같은 향신료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후 해적들이 마지막 불꽃을 태울 수 있었던 계기 중 하나는 11년간의 스페인 계승전쟁을 종식시킨 위트레흐트 조약(1713~4)이었다. 조약의 결과, 영국은 스페인으로부터 30년 간 독점적인 노예공급권을 보장받았고, 전쟁으로 일자리를 잃은 남자들이 대거 바다로 몰려갔다. 사실 스페인 계승전쟁이 끝나기 전인 1713년부터 영국왕립아프리카회사는 이미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북쪽의 세네갈에서 남쪽의 앙고라까지 4900킬로미터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왕립회사는 노예무역뿐 아니라 금과 상아를 비롯한 귀중품 등의 무역도 장악했다. 18세기 초에는 매년 대략 2만 5천 명의 노예들이 신세계로 팔려갔는데, 이들은 해적들의 일거리이자 표적이 되었다. 기니 해변은 노략질의 주무대였고 마다가스카르는 해적들의 안식처였다. 일부 해적들은 마다가스카르에 반해서 아예 그곳에 정착했다. 그중에는 1686년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1719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30년 이상이나 그곳을 통치한 존 리버스 같은 인물도 있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에드워드 잉글랜드(Edward England, 1690(?)~1720)는 1718년 마다가스카르의 요한나로 가서 해적 선단과 자신의 요새를 만들고 아프리카 주위의 배들을 약탈했다. 그는 1720년 동인도회사의 상선을 나포하여 7만 5천 파운드의 화물과 보석을 얻기도 했다. 찰스 존슨은 《가장 악명 높은 해적들의 강도질과 살육의 역사》에서 잉글랜드의 부하 한 명을 ‘끔찍한 구렛나루와 나무 다리를 가진’ 외다리로 묘사했는데 이 인물이 아마도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1883)에 나오는  존 실버의 모델이었을 것이다.)

 

 

바솔로뮤 로버츠(Bartholomew Roberts, 1682∼1722)

 

바솔로뮤 로버츠(Bartholomew Roberts, 1682∼1722)는 ‘해적의 종말’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검은 남작’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총 470척의 배를 털었다.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옷도 잘 입었고 고문과 살인에도 능했다. 로버츠는 북아메리카 해안에서 남아메리카로 항해하면서 네덜란드 상선, 영국의 노예무역선, 포르투갈의 황금 수송선 등을 공격했다. 또 세인트 킷츠 항구를 공격하여 영국과 프랑스 선박들을 불태웠고, 마티니크 섬의 프랑스 전함을 나포하면서 프랑스 총독과 총독의 여자와 승무원들을 죽였다. 1721년경에는 서인도 제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해적 소탕을 위해 각국의 해군력이 동원되자 로버츠는 아프리카로 가서 상선과 군함을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이에 해적 사냥꾼들까지 나섰고, 1722년 영국 군함 제비호는 로버츠의 배를 발견했다. 로버츠는 군함이 발사한 머스킷 총알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른바 ‘해적들의 황금시대’는 로버츠의 죽음과 함께 끝났고, 주요 해양 국가들의 통제력이 커지면서 대략 1730년경에는 해적들이 현저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호종헌(胡宗憲1512~1565)

 

극동지역에서는 좀 더 일찍 해적 활동이 사그라졌다. 9세기에 한국(신라) 해적들은 여러 차례 일본을 침략했다. 이때 일본 천황이 만든 대응 부대가 이후 천 년간 일본을 지배할 사무라이의 시초였다. 결국 신라인들은 해적질을 접어야 했다. 13세기에는 일본 해적들이 난립했다. (왜구가 문헌에 처음 등장한 해는 1223년이다.) 그들은 규수, 이키 섬, 쓰시마 북쪽 해안을 근거지로 삼고 고려를 공격했다. 1274년부터 시작된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일본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뒤 왜구는 고려를 더 자주 약탈했다. 1380년 조선 태조는 조선 남부의 금강 입구에 나타난 대규모 왜구 함대를 대포로 제압했고 1389년과 1419년 두 번에 걸쳐 쓰시마 섬을 공격하여 왜구 기지를 초토화시켰다. 왜구는 조선에게 반격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욱 세력을 키워 중국 산동 반도와 양자강 하류 지역까지 공격했다.

 

명나라 주원장은 왜구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했으나, 당시 왜구의 3분의 2는 중국인들이었다. 당시 ‘왜구의 왕’으로 불린 사람은 중국인 왕직(汪直 왕즈, ?~1557)이다. 그는 원래 소금상인이었다가 밀수품으로 일본, 필리핀, 안남, 타이, 말라카 등에서 교역하며 부를 쌓았다. 1540년에는 일본을 근거지로 삼고 중­일 무역의 중개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1547년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이 강화되고 단속이 심해지자 왜구와 결탁하여 중국연안을 약탈했다. (왕직은 1557년에 절강 총독 호종헌(胡宗憲1512~1565)에게 회유 당하여 붙잡혀 처형됐다. 호종헌은 왕직을 사면시켜 상업을 장려하자고 황제에게 건의했다가 다른 신하들에 의해 반역자로 몰려 자살했다.) 이후 명나라는 이웃 국가들과 무역을 완전히 중단했고 중국 선원들, 상인들과 모험가들은 내륙에 갇혔다.

 

포르투갈을 통해 일본에 총이 소개되자 1542년부터 왜구도 총을 썼다. 1548년, 중국 상해 앞바다의 쌍서도(절강성 조산시 육횡도)는 포르투갈 무역 상인들의 근거지였는데, 절강 지방 총독 주환(朱紈 주완, 1494~1550)이 폐쇄했다. 이를 계기로 일부 포르투갈 인들까지 해적에 가담했다. 1551년에서 1560년 사이에 왕직을 중심으로 한 왜구 연합은 중국을 467차례나 공격했다. 하지만 왜구는 오래 가지 않았다. 명나라의 뛰어난 해군 장수 척계광(1528~1588)과 유대유(1503~1579)는 왜구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했고, 장차 일본의 섭정이 될 다이묘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마침내 히로시마에 근거를 두고 30년 동안이나 해적질을 했던 무라카미 일족을 무찔렀다. 이미 1566년에서 1557년 사이에 포르투갈과 명나라 황제 융경제(재위 1567~1572)는 왜구에 맞서 협력 작전을 펼치고 있었고 그 대가로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에 정착했다.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1999년까지 점유했다.)

 

1597년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 기독교인 몇 명을 본보기 삼아 처형했다. 그들이 일본 천황보다 로마 교황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633년 제3대 도쿠가와 쇼군인 이에미쓰(1604~1651)는 일본에서 기독교를 믿고 전파하는 것을 금하는 ‘쇄국령’을 발표했다. 2차 칙령은 1635년, 3차 칙령은 1639년에 발표했는데, 이를 무역상과 해적에게 똑같이 적용했다. 1640년 포르투갈 선장 한 사람과 선원들이 이에미쓰 쇼군을 설득하여 무역을 재개하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나가사키 항으로 들어갔는데, 선원 57명이 목이 잘렸다. 일본은 두 세기도 넘게 중세적인 고립상태에 있다가 1853년 미국에게 항구를 열었다. 18세기 극동 지역에서는 해상세력이 없다시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