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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본 칼럼

[18세기] 중국은 왜 바다를 포기했나

 

 

18세기 이후 영국은 ‘바다의 폭군’이 되었다. 이 말을 했던 사람은 프랑스의 외무장관이었던 슈와죌(Ḗtienne­Franḉois de Choiseul, 1719~1785)이다. 그는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 참여했던 군인 출신으로 루이 15세의 애인 퐁파두르(1721~1764) 부인의 신임을 얻어 로마와 비엔나 주재 대사를 역임하면서 7년 전쟁의 계기가 된 오스트리아­프랑스 동맹에 힘을 기울였다. 슈와죌은 1761년~1766년 육군장관 겸 해군장관으로서 해군력 강화에 힘을 기울였는데 결국은 식민지 전쟁에서 패하여 1763년에 영국과 굴욕적인 파리조약(프랑스가 북미의 루이지애나를 영국·스페인에 할양하고 인도 샹데르나고르를 제외한 일체의 식민지를 포기)을 체결했다.

 

대륙국가인 프랑스와 해양국가인 영국은 중세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대립했다. 1688년부터 1815년 사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7번의 큰 전쟁을 치렀다. 두 나라는 18세기 전후 내내, 적어도 60년 넘게 전쟁상태였다. 9년 전쟁, 스페인 계승전쟁,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7년 전쟁, 미국독립 전쟁, 프랑스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에서 프랑스가 이겼던 예는 자국의 입장에서는 실속 없었던 미국 전쟁뿐이었다. 영국은 18세기 내내 대포와 범선을 개량하여 바다를 지배했다. 범선은 19세기 중반까지 바다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리스 독립전쟁(1821년~1829년, 그리스 독립을 지원하는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군과 오스만 제국·이집트 간의 전쟁. 1832년 그리스는 ‘일단’ 독립했다.) 이후 증기선의 출현으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무역과 전쟁, 심지어 당시로선 벤처기업 활동이라고 할 만한 해적질을 하기 위해서라도 당시 국가들이 바다와 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베네치아는 세계 무역항으로서의 자국의 역할이 줄어들기 전까지 그랬고, 스페인은 무적함대 패배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해군력 증강에 힘을 쏟았다. 네덜란드는 영국 패권 이전엔 바다의 왕자였고, 프랑스도 미국 전쟁에 전함을 파견할 정도였다. 18세기 육상 전쟁의 3요소는 머스킷 소총, 대포, 기병대였다. 17세기 말의 마지막 네덜란드 전쟁에서부터 프랑스 혁명 전쟁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절대군주들이 끊임없이 벌였던 전쟁의 결과는 ‘끝없는 무승부’라고 할만 했다. ‘18세기 전쟁들’이 끝나는 이유는 승패가 확실히 가려져서가 아니라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한 돈과 인력의 고갈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 각국은 내부의 정치적 문제와 경제 상황 때문에 해군력 강화를 주저하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 1810년 영국도 해군력을 감축했다. 1815년 이후 수년간 해군력을 증가 시킨 국가는 미국뿐이었다. 아무튼 18세기 당시 섬나라인 영국만큼 해군력이 절실한 국가는 없었을 것이고, 산업혁명의 요람지이기도 한 과학강국 영국은 바다의 지배자였다.

 

 

        정화(鄭和, 1371~1434)

 

18세기 강희제-­옹정제-­건륭제 때 전성기를 맞이했던 청나라는 주로 내륙 정복에만 열을 올렸다. 아편전쟁(1839~1842) 이후 청나라가 서구 열강들에, 심지어 일본에게도 짓밟혔던 주요 원인은 해군력 부재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청나라는 왜 미국처럼 후발주자로서라도 해군력을 재건하지 못했을까. 중국은 명나라(1368~1644) 때 해양강국이었다. 영락제 때의 환관이자 군인인 정화(鄭和, 1371~1434)는 대규모 군단을 이끌고 아프리카까지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조공무역은 명나라 때 이룬 것이다. 당시 유럽 상인들은 명나라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중남미에서 약탈한 엄청난 양의 은을 중국에 지불했다.

 

1449년 몽골을 제압한 오이라트 족이 명을 침공하자 황제(영종, 재위 1435~1449/ 복위 1457~1464)는 정벌에 나섰다 실패하고 황제 자신이 포로로 잡히는 일이 있었다. 이후 명은 내륙을 단속하기 위해 바다에 관한 한 쇄국정책을 펴게 된다. 선박 건조를 소형선박으로 제한하고 조선 인프라를 거의 없애는 대신 만리장성을 쌓았다. 명의 해군력이 약화되자 왜구를 비롯한 해적들이 들끓었는데, 명은 해적에 반격을 가하는 대신 해적을 굶겨죽이겠다는 황당한 정책으로 막대한 비용을 들여 해안 주민들을 강제로 철수시켰다. 중국의 조선 인프라가 청대에도 회복되지 않았던 중국의 황제 독재체제 때문이다. 유럽의 경우엔 황제 1인의 명령에 따라 특정 산업 활동을 전면 제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의회 성립이 불가능한 청의 둔한 정치체제는 결국 혁명을 불러오게 된다. 일본도 1600년 이래 쇄국정책을 이어갔다. 18세기에 일본은 국외로 나갔다 들어오는 자국민을 사형에 처했다. 하지만 일본은 중국과 달리 메이지 유신으로 후발 해양강국이 됐다. (메이지 유신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의 정당정치와 의회제도 육성이었다.)

 

※ 참고 책

《세계전쟁사》존 키건/ 유병진, 까치, 1993/1996

《근-현대 중국사》이매뉴얼 C.Y. 쉬/ 조윤수, 서정희, 까치, 1970/ 2013

《근대 전쟁의 탄생》크리스터 외르겐젠/최파일, 미지북스, 2011

《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윌리엄 T. 로/기세찬 , 너머북스, 2009/ 2014

《세계를 뒤흔든 바다의 역사》서양원, RHK, 2014

《이야기 일본사》김희영, 청아출판사,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