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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본 칼럼

<정은임의 영화음악> 다시 듣기



팟캐스트 검색을 하다가 <FM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를 발견했다. 이 팟캐스트는 1992년~1994년까지의 MBC 라디오 방송을 누가 녹음해서 올려놓은 것이다. 녹음 음질도 좋지 않은 편이고 초반부 광고 방송도 그대로 살아있다. 그런데 그런 게 참 좋다. 이 방송은 당시 매일 새벽 1시~2시까지 했는데, 열성 팬들이 많았다. 새벽 1시 라디오 프로그램에 광고가 완판되고 초반 광고 시간만 4분이 넘었다. 2004년 교통사고로 죽었던 DJ 정은임의 기일을 아직도 챙기는 팬들이 제법 된다고 하니 당시 정은임과 방송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하긴 20년 전의 방송이 지금 팟캐스트로 올라온 것 자체가 당시의 인기를 증명하는 것이겠지만.


이념의 시대, 총과 칼의 시대였던 1980년대를 지나 돈의 시대, 문화의 시대인 1990년대가 되었다. 1990년대 들어 한국에서는 온갖 문화 관련 논의들이 쏟아졌다. 이전 '대결의 시대' 땐 하지 못했던 말들이 병목현상을 일으키며 아우성 쳤다. 영화와 음악은 이런 논의들을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형식' 역할을 했다. 이 시점에 <정은임의 영화음악>이 나왔고 이 방송은 당시 대중들의 문화에 대한 갈증을 적절하게 해소해주었다. 게다가 이 방송은 오프닝 멘트를 이용하여 강제철거의 부당함을 비판하기도 했고, 볼세비키의 <인터내셔널>을 틀어주기도 했다. 방황하던 80년대 세대까지 껴안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 방송은 DJ 정은임의 것이었다. 차분한 목소리, 영화와 음악에 대한 식견, 게다가 예쁜 외모로 충성팬들을 확보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인기절정이던 1995년, 갑자기 DJ가 교체된다. 새로운 DJ는 배유정이라는 프랑스 동시통역사 겸 방송인이었다. (이 여자는 1998년 <아름다운 시절>이란 영화에 비중있는 역할로 출연하기도 했다. 지금은 뭐 하는지 안 보이던데...) 팬들은 당연하게도 정은임이 사회참여적인 발언을 했기 때문에 잘렸다고 생각했고 DJ 교체에 적극 항의했다. 그리고 직접 폭탄을 맞은 사람은 새 DJ 배유정이었다. 당시 배유정은 직접 방송에서 '민망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멘트를 해야했을 정도였다. 


나도 다른 많은 팬들처럼 정은임에서 배유정으로 DJ가 바뀌고 난 뒤 간간이 몇 번 듣다가 더이상 <FM 영화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다. 배유정의 멘트에서 영화와 음악에 대한 깊이나 식견을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정은임에 대한 의리 때문에. 


몇 번 듣지 않았던 배유정의 초기 방송에서 내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황당했던 에피소드 하나.

어느날 <배유정의 영화음악> 초대손님으로 영화감독 변영주가 나왔다. 그리고 변영주는 당시 히트했던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두고 '미국의 자만심으로 가득한 구역질 나는 영화'로 평가했다. 그런데 변영주가 나오기 직전에 DJ 배유정은 <포레스트 검프>를 두고 '인간승리를 그린 아름다운 영화'라고 소개했거든. 배유정은 변영주의 멘트에 어찌할 바를 몰라 버벅거렸던, 거의 방송사고에 가까웠던 사건이 떠오른다. (변영주의 영화읽기도 황당했고, 배유정의 식견없음도 한심했고...)


본 조비의 <Keep the Faith> 신보 광고가 흐르는 <정은임의 영화음악> 팟캐스트를 추억에 젖어 듣고 있다. 듣다보니 20년 전 문화 상황을 잘 기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거론됐던 영화와 음악 중에 지금도 살아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들을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반가운 팟캐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