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각지의 도서관에서 《안네의 일기》와 홀로코스트 관련 책들이 지속적이고 대량으로 훼손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25일 언론에 따르면 일본 경시청은 도쿄도내에서만 305권의 피해 사례를 확인했다. 국제 유대인 인권보호기구 '사이먼 워젠텔 센터'는 "편견과 증오를 가진 사람들이 안네의 용기와 희망, 사랑이 넘치는 역사적 기록을 훼손하려 한다"며 경찰의 적극적인 대처를 요구했고, 세계의 여론은 대체로 이번 사건과 최근 일본의 우경화 경향을 함께 엮어 비판하고 있다. 서구에선 대체로 이런 사건을 '반달리즘'이라고 하는데, 이번 사건이 워낙 '야만적'이기 때문에 일본의 우익세력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역공작이 아닐까, 라는 음모론까지 떠도는 형국이다.
《안네의 일기》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나로선 이번 사건이 오히려 반갑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안네의 일기》에 관심을 기울일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 '노이즈 마케팅'을 쓴 게 아닐까, 라는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안네의 일기》는 독일계 유대인 안네가 부모와 언니, 또 다른 가족과 함께 나치의 막판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의 은신처에 숨어 살면서 쓴 일기를 모은 책이다. 1947년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당시 은신처에 숨어있던 사람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안네의 아버지가 일기의 상당한 부분을 고의적으로 누락시켰다. 안네의 내밀한 성에 대한 생각들과 페터를 향한 사랑, 또 안네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인 생각과 주변 사람들과의 민감한 갈등 등과 관련한 내용들이 누락된 부분들의 주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1991년 '안네 프랑크 재단'은 '무삭제 완전판'을 공개하기로 했고 지금은 대체로 안네의 일기를 원본에 가깝게 읽을 수 있다.
안네는 1942년 6월 12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 일기를 썼다(13살부터 15살 때까지). 내가 《안네의 일기》를 더 재미있게 읽었던 이유는 안네의 작가로서의 자의식 때문이었다. 1944년 봄, 네덜란드 망명 정권의 교육부 장관 볼케스타인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이 끝나면 네덜란드 국민의 수기 또는 편지를 모아서 공개할 것'이라고 했다. 이 방송을 들은 안네는 전쟁이 끝나면 자신의 일기를 바탕으로 책을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래는 '1944년 3월 29일 수요일/ 이 체험을 책으로 쓰고 싶다' 편의 한 단락이다.
(이하 인용은 '문학사상사'에서 펴 낸 《안네의 일기》(1995)에서 발췌했다.)
(...)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모든 사람들이 나의 일기에 주목하게 되겠지요. 이 은신처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책으로 엮어 발표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지 한번 상상해 보세요. 제목만 보면 독자들은 탐정소설이라고 생각하겠죠(역주: 《안네의 일기》의 원제는 《헤트 아흐터르하이스(Het Achterhuis)》로 '뒷집'이라는 뜻인데, 다른 나라에는 이런 건축양식이 없어 적당한 단어가 없다. 이 책에서는 그냥 '은신처'라고 하고 있다.) (...)
다음은 '1944년 4월 6일 목요일/ 나의 취미 나의 관심사' 편의 한 부분이다.
사랑하는 키티에게. (주: 키티는 안네의 일기장에게 붙인 이름이다.)
당신에게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나의 취미와 관심사에 대해 쓸까 합니다. 미리 말하는 건데 너무 많다고 놀라지 마세요!
우선 첫번째는 글쓰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취미에 포함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두번째는 계보 조사입니다. 지금까지 신문과 책, 팸플릿 등에서 프랑스, 독일, 스페인,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노르웨이, 네덜란드 각 왕실의 계보를 찾을 수 있는 데까지 조사했습니다. (...)
세번째 취미는 역사에 관한 관심입니다. 지금까지 아빠가 역사책을 많이 사주셨지만, 언젠가 공립 도서관에 가서 책꽂이에 즐비한 책들을 한 쪽 끝부터 다른 쪽 끝까지 차례차례 읽어 볼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번째는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 분야의 책도 여러 권 갖고 있습니다. 아홉 뮤즈들(역주: 문예·음악·무용·철학·천문 등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을 담당하는 여신들)의 이름이라든지 제우스의 일곱 연인의 이름 등은 언제라도 줄줄이 열거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헤라클레스의 부인들의 이름까지 뭐든 모르는 게 없습니다.
그밖에 영화 스타 및 가족의 사진을 모으고 있고, 미술가·시인·화가의 전기 등에도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머지않아 음악가에게도 관심을 쏟게 될지 모릅니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과목은 대수와 기하, 그리고 산수입니다. 다른 과목은 다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역사를 가장 좋아합니다.
(...)
다음은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단편소설 응모를 결심' 편의 한 부분이다.
(...)
가까운 시일 내에 《프린스》지에도 내가 쓴 글을 보내서 채택되는지 한번 시험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익명으로 말이에요. 내 작품은 단편소설치고는 너무 길어서 뽑힐 가능성이 희박할 거예요.
(...)
이후 일기에서도 작가의 꿈을 키우며 쓴 글들이 많다. 실제로 안네는 <탐험가 블루리의 모험>이라는 단편소설을 써서 주변 사람들에게 읽혔고 다른 소설들도 습작했다. 안네의 작가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1944년 4월 5일/ 죽은 뒤에도 기억되고 싶어요' 편이다.
(...)
나는 글 쓰는 걸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엄마와 판 단 아주머니, 그 외에 많은 여성들처럼 매일 집안일만 하다가 어느 사이엔가 잊혀진 존재로서 한평생을 보내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꼭 무언가를 얻고 싶습니다. 남편과 아이들말고도 이 한몸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무언가를 말이에요.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뚜렷한 목표 없이 그냥 타성에 젖어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을 주는 존재이고 싶습니다. 내 주위에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필요한 존재이고 싶습니다. 나는 죽은 후에도 여전히 기억되고 싶습니다.
(...) 과연 내게 문학적인 재능이 있을까요? 언젠가는 저널리스트나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 꼭 되고 싶습니다. 글을 쓰면 나의 상념, 이상, 꿈 등 모든 걸 새롭게 파악할 수 있거든요.
자신의 작품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싶다는 것은 대다수 작가들의 강렬한 염원인 것이다.
《안네의 일기》는 당시 사회상과 생활상을 상세히 기록했기 때문에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책이고 전쟁 기간에 겪은 경험을 아주 구체적이고 재미 있게 서술했다. 이번 기회에 혹 《안네의 일기》 를 읽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한번 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보통 사람이 반달리즘에 대응하는 가장 현명한 길은 그저 책을 읽는 것이다.
끝으로 안네가 '1944년 5월 11일/ 작가를 지망하는 내가 해야 할 공부' 편의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
우선 내일까지 《갈릴레오 갈릴레이》 제1부를 다 읽어야 합니다. 도서관에 반납해야 하거든요. 이제부터 읽기 시작해서 지금 220페이지를 읽고 있으니까 다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다음 주에는 《기로에 선 팔레스타인》과 《갈릴레이》 제2부를 읽어야 합니다.
두번째로 《황제 카를 5세》 제1권을 어제 읽었기 때문에 읽으면서 필기해 놓은 걸 바탕으로 계보와 도표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어서 여러 책에서 뽑아 정리해 놓은 3페이지 분량의 외국어 단어를 암기하고, 노트에 쓰고, 완전히 이해해야 합니다. 네번째로 소중히 간직해 둔 영화 스타의 사진을 정리해야 하는데, 이것을 정리하는 데는 여러 날이 걸릴 거예요. 안네는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 혼돈은 당분간 방치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테세우스, 오이디푸스, 오르페우스, 야손, 헤라클레스 등등 신화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야 합니다. 그들의 업적이 내 머리 속에서 능직의 실처럼 얽혀 있거든요. 게다가 고대 조각가인 미론과 피디아스 두 사람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파악해두고 싶으니까 슬슬 시작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리고 7년 전쟁, 9년 전쟁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합니다.
(...)
아, 또 있습니다. 성경이에요. 지금 상태로는 《외경》의 목욕하는 수잔나까지 얼마나 걸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아아, 조사하고 공부해야 할 게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요. 그 동안 《팔츠의 리셀로테》는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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