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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스포츠

런런 쇼, 홍콩 무협영화의 시조

호, 불호를 떠나 우리세대에게 홍콩 무협영화가 갖는 울림은 남다를 것이다. 정통 무협영화를 추억하기엔 비교적 젊은(?) 세대인 나도 들끓는 모래무덤에 손가락을 단련하는 철인이나 이소룡의 정무문을 모를리 없고, 정통무협을 비트는 방법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성룡의 취권을 소중한 청소년기의 역사로 기억한다. 


뉴욕타임즈는 오늘, 홍콩영화, 방송산업의 대부이자 홍콩무협영화의 시조격인 런런 쇼(중국명, 사오이푸)가 10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중국 저장성에서 태어나, 샹하이에서 성장한 런런 쇼과 런미 쇼 형제의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형제의 별칭인 런런(Run Run), 런미(Run Me)는 이들의 아버지가 인력거의 영어표기인 릭쇼 (rickshaw)가 자신들의 성과 발음이 비슷하다고 '달린다'의 영어표기 런(Run)을 붙여 장난스럽게 부르던 이름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평생의 닉네임된 것이다.


사업보다는 연극,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형제는 2차대전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영화산업에 뛰어드는데 형인 런미 쇼는 싱가포르에서, 런런 쇼는 홍콤으로 각가 이주 했다. 런런 쇼는 1960년대 후반 제작된 최초 쿵후영화인 '외팔이 검객'을 시작으로 '죽음의 다섯손가락','철인','소림 36방' (타란티노가 이 영화에 감동받아 만든 영화가 '킬빌'이라고 함)등의 무협영화를 포함 평생 700여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했다. 


승승장구하던 런런 쇼의 무협영화가 쇠퇴하기 시작한 건 이소룡 때문이었다고 뉴욕타임즈는 보도했는데, 편당 1만달러의 출연료를 보장받는 장기 계약을 원했던 이소룡의 제안을 런런 쇼가 거부했고 당시 신생 영화사였던 골든 하베스트는 삐쳐있던 이소룡의 조건에 화답함으로써대어를 물게 된 것이다. 영화 '정무문'의 성공과 함께 골든 하베스트는 이 후 홍콩 최대 영화사가 된다.


영화제작의 주도권은 골든 하베스트에 넘겨 주게 됐지만 이 후 런런 쇼는 방송산업에 눈을 돌려 그가 영화로 이룬 성공보다 더 큰 성공을 일궈냈으니 그닥 섭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굉장히 열정적이고 건강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하고 짐작하는데, 그는 무려 104세까지 현직에서 일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놀라웠던건, 개인적으로 최고중 하나라고 기억하는 영화 '블래이드 러너'를 런런 쇼가 제작했다는 점이다. 그가 블레이드 러너의 제작에 얼마나 깊은 관여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선구안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제작한 영화중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고 묻는 생전 인터뷰에서 '돈 많이 벌어준 영화'라고 답했다는 것을 보면 엄청난 오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