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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본 칼럼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의 유래



정치적·종교적 성공, 그리고 이후 영향력 등을 고려했을 때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인물이라고도 불리우는 무함마드는 570년경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고아로 자랐다. 나중에 꽤 연상의 부잣집 과부와 결혼했다가 마흔 살이 넘어서야 신의 계시를 받고 스스로 예언자로 칭했다.

예수와 무함마드의 차이점은, 예수는 그 자신을 신 또는 신의 아들, 또는 구원자로 자처했지만 무함마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칭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무함마드와 예수가 말한 신은 같은 존재다. 무함마드도 예수처럼 유일신을 전파했고 인간은 신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신을 외면하면 지옥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도 예수와 같았다.

무함마드의 가르침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폭발적으로 교세를 떨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당시 무함마드나 예수의 가르침을 접하지 못했던 지역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다. 종교 확장을 사업 확장에 비유하면, 당시 이슬람교가 정복할 땅과 사람들, 즉 시장이 무궁무진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슬람교는 유일신교의 불모지 아라비아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이슬람 세력은 매우 관대했다. 정복한 지역에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고 단지 세금에서 어느 정도의 차별을 두었을 뿐이었다. 무함마드는 경전을 가지고 있는 유일신 종교라면 개종을 강요하지 말고 관용을 베풀라고 강조하고 실천했는데, 그는 유대교와 기독교는 물론 심지어 조로아스터교까지 존중했다.

또 무함마드는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민중의 습성을 잘 이해했고 '코란'으로 집대성 했던 교리도 사막의 민담과 격언을 적절하게 각색한 것이었다. 일부다처제나 노예제 같은 뿌리 깊은 제도도 급격하게 바꾸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민중의 수준에 맞춰 토속신앙도 인정했다.

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물론 기독교 측의 광신적인 도발이 늘 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그리고 무슬림은 교리적으로 기독교의 3위 일체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살라딘이 활약했던 십자군 전쟁 시절에 이슬람 군대는 기독교 군대에게 3명의 신을 섬긴다는 의미로 '다신교 이교도들'이라고 욕을 했다.

이슬람력의 원년인 622년 헤지라(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것)가 이뤄지고, 633년부터 이슬람군은 대규모 정복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3년 만에 다마스쿠스를 점령했고, 이어 예루살렘과 시리아 전역을 차지했다. 그리고 10년 안에 이집트와 아르메니아를, 20년 만에 페르시아 제국을, 30년 만에 아프카니스탄과 인도 북부 펀자브 지역 대부분을 정복했다. 

무함마드는 위 대규모 정복 활동 직전인 632년에 열병에 걸려 죽었는데,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부하였던 아부 바크르가 칼리프(예언자의 대리인, 정치와 종교 지도자)가 되어 무함마드를 계승했다. 아부 바크르는 634년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바로 그날 죽었던 것으로 알려졌 있고 뒤이어 우마르가 2대 칼리프가 되었다. 644년 우마르가 죽고 우스만이 3대 칼리프가 되었는데, 우스만은 당시 아랍 총독 무아위야의 건의로 이슬람 군 최초의 함대를 창설했고 그것을 자신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남겼다. 

무아위야 장군이 함대를 거느리고 비잔티움 제국을 목표로 발칸 지역을 휩쓸며 정복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우스만 칼리프가 메디나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암살당한다. 후임 칼리프로는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선출되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무아위야는 알리가 우스만의 죽음에 관련 있다고 주장하면서 알리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분쟁은 오래 계속되다가 661년 결국 알리가 암살되고 무아위야가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종결되는 듯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5년 동안 제위를 둘러싼 분쟁이 계속됐다. 그리고 그 분쟁은 지금 현대에도 계속 되고 있다.

모계사회였던 아라비아의 전통에 따라 무함마드의 사위였던 알리가 칼리프가 되는 것은 정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전 무함마드를 계승했던 아부 바르크-우마르-우스만-알리 칼리프 시기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무아위야가 권력을 잡으면서 이슬람 제국은 '우마이야 왕조 시대'로 접어드는데 정통성의 문제는 이후로 계속 이슬람 세계에서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시아파는 알리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급진파가 되었고, 수니파는 다수파로서 이슬람의 현실적인 권력을 인정했다. 즉 정통파지만 소수파가 '시아파'다. 

시아파는 알리 이후의 권력자들을 인정하지 않는데 반해 수니파는 무함마드 이후의 정통 칼리프들도 무함마드의 합법적인 후계자로 인정하면서 현실 권력 특유의 포용력을 보여준다. 오늘날 시아파는 전세계 13억 무슬림의 13% 정도 차지하고 있고 주로 이란 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시아파는 수니파보다 더 근본주의적이고 과격하다. 그들은 이슬람 세계는 종교지도자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수니파는 현실의 정치세력도 신의 뜻으로 인정해야 한다며 정교 분리를 받아들인다.

이란에서는 지금도 매년 알리를 추모하는 행사를 눈물을 흘리면서 열고 있다. 이란이 예전에 이라크의 후세인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도 후세인 세력이 수니파였기 때문이고, 언론에 종종 거론되는 과격 민병대 '헤즈볼라'는 시아파들이 주축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이란의 시아파들은 은근히 좋아함으로써 친미적인 냄새까지 풍겼고, 종종 헤즈볼라의 테러가 도를 지나치다 싶으면 친미 아랍 국가의 대표 격인 사우디 아라비아는 헤즈볼라 비난에 앞장선다. 즉, 중동 지역의 혼란은 민족을 뛰어 넘은 뿌리 깊은 이슬람 종교 분쟁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아랍 국가로 둘러 쌓인 작은 국가인 이스라엘이 깡패 짓을 할 수 있는 이유도 아랍 세력이 종교 때문에 좀처럼 단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세 절정기의 1차 십자군 원정에서 유럽 연합군이 손 쉽게 승리했던 것도 당시 무슬림 세력이 정치적 분열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시아파와 수니파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3차 십자군 전쟁의 영웅 살라딘은 자신의 무슬림 장악 초기에 이집트의 시아파 세력을 냉혹하게 처단했다. 이후 살라딘은 무슬림을 수니파 기치 아래 단결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지하드'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아랍 : 아라비아 지역과 그 영향력이 미치는 민족
이슬람 : 신에게 복종한다는 뜻. 종교 이름
무슬림: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 즉 이슬람교도
사라센(Saracen) : 로마제국 후기에 고전작가들이 시나이 반도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이슬람교가 성립한 뒤로는 사실상 이슬람교와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중세 초기에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사용하다가 십자군을 통해 서유럽까지 전해져 오늘날도 쓰이게 되었다.


(by 이기본. 201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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