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세대로 태어난 사람들에게 6.25는 점점 기억하기 어려운 전쟁이 되어가고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반세기 넘는 긴 평화가 이어져 온 덕분에 우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곧잘 망각된다. 이것이 때때로 정치적 놀음에 이용되는 핑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불평만을 하게 만들 뿐.
전쟁이라는 거대한 테마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하게 되는 질문은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 일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철조망을 뚫고 전진하는 붉은깃발을 단 탱크의 이미지는 북한의 남침을 각인시키는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먼저 싸움을 건 쪽이 있으니 이에 응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는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남한이나 북한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당시 전쟁 수행의 능력이 없는 남, 북한 모두가 외국의 원조 혹은 동참을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정당성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부르스 커밍스 (Bruce Cumings)는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 이 물음에 답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해방 직후의 한반도 현실 속에 있으며, 내전은 1945년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것이다. 원론적이고 중도적인 시각이라 선명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겐 애매한 결론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6.25 전쟁에서 만큼은 누가 전쟁을 일으켰느냐를 밝히는 것이 의미있을까라는 회의를 갖게된다. 당시의 남,북한 위정자들은 남침이든 북침이든 전쟁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점에서 만큼은 완벽한 의견일치를 이루고 있었고 서로의 덜미를 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것은 넘치는 자료가 증명하는 일이다.
'한국전쟁'의 저자 와다 하루끼의 의견을 간추리면 북한은 6월 25일의 전면 공격을 위해 최소한 두달 이상의 준비기간을 거쳐 군사와 무기를 38선 근처로 집결시키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최초 공격이 시작된 옹진지구는 "1949년 5월부처 연말까지 양군이 서로 월경공격을 가하여 전투를 되풀이한 " 터였고 1950년 5월과 6월 사이에도 10여건이 넘는 발포사건이 있었던 지구였다. 6.25일 당일의 옹진지구에서 일어난 사건기록은 발견된게 없지만 그간의 선례로 보건데 누가 선제 공격에 나섰는가가 불분명한 지구였으며 개전 다음 날인 6월 26일, 서로가 서로를 침략자로 지목함으로써 누군가는 의도한 목적을 달성했다. 북한으로써는 소련과 중국의 원활한 지원을 약속받기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언이었고 미국을 끌어들여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싶어했던 이승만 정권으로써는 호기를 잡은 셈이었다. 6월 26일 대통령 관저를 방문한 주한 미국대사 존 무쵸 (John Muccio)의 회상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어쩌면 현재의 위기는 한반도 문제를 일거에 전면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북한의 전쟁 준비를 감지하고 있었을까? 당시 워싱턴으로 전송되던 미군 보고서 (Daily Intelligence Summary)에 의하면 미국은 북한의 움직임을 거의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1950년 4월과 5월 보고서에서는 6월 23일 전후에 있을 공격가능성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정황보고는 한반도를 중요 거점으로 파악하지 않던 당시 미국의 군, 정부 분위기에서 쉽게 무시되었거나 큰 관심을 끌어내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최선의 기회'라고 말했던 것은 멀리있던 미국의 관심을 돌려 적극적으로 전쟁에 끌어들일 수 있는 핑계를 찾아냈다는 의미였을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6.25 전쟁의 의미를 그에 따른 물질적 정신적 피해에 입각해서만 분석하려고 한다면 매우 부족한 분석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 전쟁은 민족의 뿌리를 흔드는 충격이었고 역사 단절과 국가 운명을 굴절시킨 중대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을 통해 잃은 엄청난 인적, 물질적 피해에 대해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나?'라는 원망을 접을 수 없는 이유는, 국토를 초토화 시키면서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의 주체가 남한도 북한도 아니었다는 점에 있다. 동북아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지던 소련과 미국의 긴장, 때마침 공산혁명에 성공한 중국과 미국의 대립은 이 전쟁이 우리의 능력보다 훨씬 큰 규모로 치러질 수 밖에 없는 원인이었고 실질적 동력이었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땅에 특설링을 열어놓고 사이 안좋은 옆 동네 형님들의 아바타가 되어 대신 싸워준 것이다.
1953년의 정전협정 그리고 1954년 제네바 협상의 결렬 이 후 60년이 흐르는 동안 최소한 6.25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 본 시계는 단 일분 일초도 흐르지 않은 것 같다. 6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정전 합의의 악수를 나눴던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제 한 사람도 지구상에 남아 있지 않으며 적이냐 아니냐를 가르던 이념은 모두 타올라 재만 남은 지 오래다. 같은 기간 동안 세계에 일어난 많은 변화들을 생각해 볼 때, 남한과 북한의 관계 나아가 한반도 문제에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여러나라들의 이해관계가 60년전 그 때와 그다지 다를 바 없다라는 사실은 거의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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