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굿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은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용어 해설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신의주 남쪽 지역에 있는 유동마을에 사는 박시봉(집주인이름) 집에서란 뜻.
- 샅 : 삿자리(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 쥔을 붙이었다 : 주인집에 세 들었다
- 누긋한: 메마르지 않고 눗눗한
- 딜옹배기 : 칠흙으로 빚은 옹배기
- 북덕불 : 북데기 (짚이나 풀, 나무 부스러기 등이 뒤섞여 엉클어진 뭉텅이)로 피운 불
- 나줏손 : 저녁 무렵 (나주는 저녁이나는 평안 방언)
- 바우섶 : 바위 옆
- 어니 : 어느
- 갈매나무 : 갈매나뭇과에 속한 좀나무. 키는 2m쯤 됟고 가지에 가시가 나며, 잎은 넓은 바소꼴이며 톱니가 있다. 열매는 '갈매' 또는 '서리자'라 하여 약재나 물감으로 쓴다.
- 정하다 : 깨끗하고 바르다
이 시는 백석이 남한에서 발표한 마지막 시다. 1948년 10월, '학풍'을 통해 발표했다. 백석이 직접 게재한 것이 아니라, 지우 허준이 보관하다가 학풍에 발표했다. 그래서 백석이 언제 이 시를 썼는지, 그 년한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광복 후부터 1948년 10월 사이 언젠가 즈음 쓰여졌을거라 추정할 수는 있다.
누구들은 이 시를 두고 백석의 민족 의식, 정치 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의견들을대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백석은 광복 후 북조선에서 활약하던 민족주의자 조만식의 비서로 일했었다(러시아어 통역도 겸함). 그런 그의 경력과 첫 시집 <사슴>이 33편의 시를 담아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을 상징했던 이력으로 이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도 그러한 맥락일거라 추정한다. 시에서 33행이 아닌 32행인 이유는 과거 민족대표 33인에서 한 명이 빠진, 즉 민족의 분열을 의미하고, '한 남자가 아내가 없고 집이 없고 부모와 동생도 없이 헤매는 풍광은 민족의 비참한 정황을 비유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이 시에서 백석이 '가슴이 메어 올 것이고, 눈이 괴일 적이며, 낯이 부끄러울 것'이라 읊은 부분은 동족상잔을 앞둔 지식인의 '수오지심'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런 분석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백석 뿐 아니라, 상당수의 '항일독립운동가'들은 저항의 대상인 일본과만 싸운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세력과 규모 면에서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던 일본이나 만주국과는 거의 싸울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일상은, 저항의 방식과 방식에 담지된 이념의 차이를 두고 벌어진 '소소한 내전'으로 가득찼다.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이런 단순도식으로 해설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엄청나게 많아진 '백석 팬클럽'들 중 일부는 위 해석으로 이 시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신의주는 가보지 못했지만, 신의주 맞은 편에 위치한 중국 단동을 종종 들리고 했던 나는, 아직은 저 심오한 해설과는 맞닿지 못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그저 떠돌면서 이곳저곳 이때저때 이놈저놈 이년저년 이일저일 등에 젖어버린, 약간 쳐져 있는 어깨와 여전히 곧추세워져 있는 등뼈의 선연함만이 조금씩 떠오른다.
백석의 말년도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북조선에 남아 있는 백석의 노년은 백석의 젊음과는 조금 다르다. 민감한 이야기지만, 백석은 굴복했을 것이다. 그러했으므로 노년을 남길 수 있었겠지. 때로 삶의 굴곡은, 삶의 서정을 정복하기도 하니까. 북조선의 권력 중앙집권 과정은 예술가들을 굴복시키면서, 시인의 언어를 전유시키면서 진행됐다. 어디서든, 권력은, 언어를 지배하고 전유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이 시는 어쩌면 백석의 마지막 시다. 북조선에 남아 있는 숱한, 백석의 냄새가 서려 있지만 튀어나오지 못하는 그 시들과는 온전히 다른, 마지막 시일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해 힘겹게 예언해 버린?
나는 아직도 이 시를 읽을 때면, 마지막 행을 빼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날들이 터럭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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