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16세기 인문주의자 평전 3권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평전은, 탁월한 인물의 삶을 되짚어 보는 재미에, 그만의 문체와 감성이 어우러지고, 무엇보다 작가의 내면이 반영되어 감동을 준다. 어떤 주제를 세워 인물을 좇아가는데, '세계의 거장'들을 세 명씩 묶어 낸 평전이 잘 알려졌다. (한국에 출판될 때는 이 구성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고 시리즈로 내어놓는 것 같다.)
※ 츠바이크의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는
1) 데몬과의 싸움 : 휠덜린, 클라이스트, 니체
2) 세 명의 거장들 :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3) 자기 삶의 세 시인 :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거장들 시리즈처럼 츠바이크가 따로 묶은 건 아니지만, 그가 고른 여러 인물 가운데에는 16세기 인문주의자가 셋 있다. 주제를 꼽아보자면, 시대의 광기와 폭력에 자기 영혼을 지킨 위대한 정신들의 이야기다.
▼ 에라스무스(1466-1536), 카스텔리오(1515-1563), 몽테뉴(1533-1592)
■ 에라스무스 평전 - 종교의 광기에 맞서 싸운 인문주의자
정민영 옮김/ 아롬미디어
원제 : Triumph und Tragik des Erasmus von Rotterdam (1934)
1934년 이 책을 내고, 츠바이크는 히틀러를 피해 오스트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갔다. 그의 저서는 금서가 되었다. 츠바이크는 "히틀러의 시대에, 비슷한 위기에서 나를 구하려고" 이 책을 썼다한다.(자서전 《어제의 세계》)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내면적인" 이 책을 쓰느라 시대의 비극에서 더는 크게 고통받지 않았으며,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은폐된 자화상"이라고 덧붙였다.
인문주의자란 어떤 사람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책이다. "세계 개혁가들보다 명료하게 시대의 광기를 이해했으나, 반이성에 맞설 수 없었던" 에라스무스를 통해.
에라스무스식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사고한다는 뜻이며, 에라스무스식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이해하고 타협한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는 패배자들에 대해선 불공평하다. 역사는 절제의 인간을, 중재하는 자들과 화해하는 자들을, 인간적인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열광적인 자, 중용을 잃은 자, 난폭한 정신과 행동을 추구하는 탐험가들이 역사가 사랑하는 자들이다.
인문주의는 제국주의처럼 의도된 것이 아니다. 인문주의는 적이란 것을 알지 못하며 하인을 원하지 않는다.
움베르토 에코가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카탈루냐 남자애가 플란더런 여자애를 만나고, 사랑에 빠져 결혼하면, 그들과 그 후손들이 유럽인이 된다'는, 에라스무스 프로그램과 유럽인의 정체성에 관한 언급.( It’s culture, not war, that cements European identity)
◀ 유럽연합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 로고
유럽연합 국가 학생들의 교환 학습 제도 이름이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이다. 유럽 나라들 안에서 자유로이 오간다지만 많은 젊은이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으로 ‘외국 생활’ 경험을 한다. 그저 학업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의 문화와 공동체 생활 경험을 통해 유럽인의 정체성을 가지게 한다는 것인데, 이 정체성이란 바로 에라스무스적인 것을 말한다.
어느 나라에도 정주하지 않았고 머무는 곳은 모두 고향으로 알고 지낸, 최초의 의식있는 세계주의자이자 유럽인이었던 그는 결코 다른 나라에 대한 어느 한 나라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에라스무스의 전기로는 ≪중세의 가을≫≪호모 루덴스≫의 저자 요한 하위징아의 ≪Erasmus≫(1924)도 있다. 츠바이크가 루터와의 논쟁 등 종교개혁을 둘러싼 풍경을 배경으로 에라스무스의 정신적 초상을 그려냈다면, 하위징아는 더 전통적인 에라스무스 전기를 썼다. ≪우신예찬≫등 저서에 대한 분석과 그의 사상을 더 깊게 다뤘다.
◀ ≪에라스뮈스≫(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하위징아의 역사서는 특히 문체가 개성 있고 아름다워서, 번역자들이 그 맛을 잘 살려냈으면 좋겠다 싶은데, 이종인 역서는 어떨지 모르겠다. 얼핏보니, 라틴어 ‘에라스무스’는 네덜란드어 한글 표기법을 적용하여 ‘에라스뮈스’로 끼워 맞춰놓고는, 지명은 기준 없이 중구난방이다. (에라스무스의 출생지로 로테르담과 다투는 중요한 지명인 하우다는, 왜 호우다인지? 뢰번은 왜 루뱅이며, 플란더런은 왜 플랑드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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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안인희 옮김 / 바오 출판사
원제 : <Castellio gegen Calvin oder Ein Gewissen gegen die Gewalt>, “칼빈에 맞선 카스텔리오 또는 폭력에 맞선 어떤 양식” (1936)
영어판 제목 : <The Right to Heresy>
이 책으로 카스텔리오라는 인물을 알게 됐고, 칼뱅의 종교권력에 대해서도 소상히 알게 됐다. 네덜란드 관용 정신의 뿌리가 카스텔리오에 있음도.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이다.
16세기에 이런 말을 했던 신학자가 있었다.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n,1515-1563)는 종교개혁 이후 처음으로 관용의 개념을 정리하여 관용 선언서를 쓴 프랑스 신학자다. 제네바를 자기 손아귀에 두었던 칼뱅이 세르베투스를 화형으로 내모는 것을 보며, 칼뱅의 독재에 <이단자에 관하여>라는 책으로 맞섰던 사람.
당시 카스텔리오의 행동은, “칼라스 사건에 대한 볼테르의 항변이나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졸라의 항변”과 비교할 수 없는 일로, 카스텔리오의 도덕적인 높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츠바이크는 썼다. 로크, 흄, 볼테르보다 훨씬 오래전에 그들보다 더 위대하게 관용을 선언하고 사상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옹호한 인물이다.
서문은 이런 말로 시작한다.
빛이 오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한 번 더 이토록 캄캄한 어둠 속에
살아야 했다는 사실을
후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카스텔리오, ≪의심의 기술≫,1562
칼뱅주의가 지배했던 나라들이 오늘날 오히려 관용의 땅이 된 이면에는 카스텔리오의 후예들이 있었다는 것과 칼뱅주의가 유럽에 남긴 유산도 짚어놓았다.
츠바이크는 1935~1936년에 이 평전을 썼다. 오스트리아를 떠나 영국에 머물 때였다.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했다. 몽테뉴가 한 말이다.
자신이 용기에 도취된 상태로 쓰러지는 사람,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확신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고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순간에도 확고하고 경멸에 찬 눈길로 적을 응시하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운명의 손에 의해 한 방 얻어맞는 법이다. 그는 죽임을 당할망정 물러서지 않는다. 가장 용감한 사람들은, 대개는 가장 불운한 사람들이다. 승리를 갈구하는 의기양양한 패배도 있다.
■ 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안인희 옮김 / 유유출판사
원제: Montaigne, 1935년~1941년 씀. 1960년 출판
박홍규 교수가 몽테뉴의 숲에서 웃었던 것처럼, 츠바이크도 몽테뉴에게서 위로를 받았나 보다. 츠바이크는 영국에서 다시 뉴욕으로, 1940년 8월에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근교의 페트로폴리스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페트로폴리스의 버려진 서가에서 몽테뉴의 <수상록>을 우연히 발견하고 읽는다.
미지근하게 좋아하던 작가를 정확하게 올바른 순간에 발견할 때의 현상을 알고 계시지요. 체념과 물러남의 대가이며 스승인 작가를 말입니다.
그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유혹을 느껴요. 또 하나의 에라스무스. 진정 위로하는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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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세 인물은 모두 16세기 유럽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츠바이크는 16세기의 상황과 자신이 살던 시대를 오가는 어떤 공통점을 보았고, 이들을 제 친구처럼 여긴 듯하다. 집단 광기의 시대에 자기 자신을 지키며, 관용과 타협과 온건함을 옹호했던 이들. 특히 몽테뉴는 그에게 마지막 친구였다. 몽테뉴 평전은 마지막 거처에서 츠바이크가 작업하던 미완성 유작 가운데 하나다. 책과 자료를 영국에 두고 브라질로 떠나온 터라 인용문을 다듬을 수 없어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괴테, 발자크, 톨스토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생애의 모든 시기에 활짝 열려있는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특정한 순간에야 비로소 그 완전한 의미가 분명하게 밝혀지는 작가"들도 있는데, 츠바이크에게는 몽테뉴가 바로 그 후자의 경우였다. "인류의 품위나 이성에 대해 스스로 의심을 품고 그것에 대해 절망도 해"보는 그런 시간을 겪으며 몽테뉴를 제대로 만났다는 말.
그는 통 속으로 기어들어간 디오게네스도, 피해망상에 파묻힌 장 자크 루소도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그를 쓰라리게 괴롭히지 않았고, 그를 고립시키거나 그가 사랑하는 이 세상에서 멀리 떼어놓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자아를 보살피는 일이 그를 세상에서 격리시키거나 고독하게 만들지 않았고, 오히려 수많은 친구들을 만들어주었다. 자신의 삶을 서술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이며, 자신의 시대를 표현한 사람은 모든 시대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츠바이크의 분류에 따르면 인문주의자들의 삶에서 갈라진 각각의 몫은 저마다 달랐다.
에라스무스와 몽테뉴는 “현자가 미친 놈과 싸워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데 반해, 카스텔리오는 “인문주의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앞으로 나서서 자신의 운명에 단호하게 맞섰던 사람”.
돌이켜보면, "인식하는 사람" 보다는 "행동하는 사람"에 더 끌렸던 적이 많았다. 에라스무스의 어정쩡함과 몽테뉴의 은둔이 고깝게 보였던 때도 있었다. (철없던 시절!) 츠바이크처럼 시대의 절망을 절절히 느껴보지는 않았으나, 언제부터인가 이 "인류의 조용한 봉사자"들에게 끌린다.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은 사람들. 자기 자신만을 대표하는 사람들. "인문주의에서 야만성으로의 추락을 무력하게 바라보아야만 했던" 그 삶들의 근원적인 비극도.
칼뱅은 마녀 재판을 옹호하면서 적대자를 서서히 불길에 태워 죽이도록 했고, 루터는 악마가 나타난 것으로 믿고 벽을 향해 잉크병을 던졌으며, 토르케마다는 수백 명을 화형에 처했다. 그들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달리 도리가 없었다는 식의 변명을 하곤 한다. 자기 시대의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인간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광신주의의 시대에도 언제나 휴머니스트들이 살았고, 마녀 박해의 시대에도 화형 재판소와 종교재판 당국은 에라스무스, 몽테뉴, 카스텔리오 같은 사람들의 명료함과 인간적인 면모를 단 한순간도 흐려놓을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상의 모든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다.
츠바이크의 자서전 《어제의 세계》를 함께 읽으면, 20세기 인문주의자의 초상과 시대의 증언을 볼 수 있다. 그가 왜 "루터가 아니라 에라스무스를,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메리 스튜어트를, 칼뱅이 아니라 카스텔리오를" 썼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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