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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본 영화읽기

<친절한 금자씨> 거리두기



1.
이 영화의 주제는 구원이다. 모든 문학작품의 주제는 "순수한 영혼의 타락"이라고 한다. (이런 면에서 [박하사탕]이라는 영화는 굉장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구원이란 주제도 "순수한 영혼의 타락"이란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을 보면 모두 그 '구원'에 대해 다루고 있다. 박찬욱의 복수 시리즈를 보면 공통적으로 복수하는 사람도 망가진다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건 인간의 딜레마다. 신이 아니므로 어떤 복수라도 완벽한 정당함을 획득하기 힘들다. 신은 '모두'를 용서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다. 죄 지은 자가 회개를 하고 용서를 구하고 구원을 얻는 것은 오히려 쉽다. 왜냐..  그건 인간이란 존재에게 매우 일반적인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못을 저지른 인간을 신의 위치에서 심판하고 그걸 용서 구하기란 매우 어렵다.
흠 많은 인간인 주제에 심판을? 그래서 정작 먼저 잘못을 저지른 인간보다 그 잘못을 심판하고자 복수하는 인간의 고뇌가 더 깊어지는 것이다.

2.
박찬욱 복수 3부작의 내용은 모두 부모/자식문제에 관련이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의 자식을 유괴당한 송강호.. <올드보이>에선 근친상간을 이용해서 잔인하게 복수하는 유지태..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파렴치한 유괴범에 대한 부모들의 집단 복수극..
자기 자식을 죽인 자에게 복수하는 것보다 더 정당한 복수가 있을까. 박찬욱은 아예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정당한 복수의 경우를 상정하고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다. 이렇게 정당한 복수를 하는데도 사람은 망가진다.. 자아~ 어떡할래?

3.
송강호는 죽음(타살)으로 구원받고 (단순한 복수이므로) 유지태도 죽음(자살)으로 구원받지만 (유지태가 최민식에게 자신이 받은 것보다 몇 배로 돌려줬다는 걸 스스로 안다는 의미?) 이영애는 살아남는다. (이전관 달리 <친절한 금자씨>의 최민식이란 복수의 대상은 동정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기 때문일까.)

이런 걸 보면 박찬욱이란 이 시리즈의 작가는 근본적으로는 매우 도덕적인 인물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4.
이 영화에선 의도적인 '거리두기'를 하면서 더욱 풍부한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냈다. 혹자는 이 영화가 일부 매니아층만 열광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닌가 하겠지만 주변을 모니터링해본 결과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얻었다. 평소 영화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영화에 대해 매우 풍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일부 아줌마들은 소년과 하룻밤 관계를 맺는 이영애를 보고 이영애를 우상으로 삼으며 유쾌해하고 있었고 이영애와 감옥에서 동성애 관계를 맺었던 여자에게 연민을 느끼는 애들의 이야기도 들었고 사소한 대사 하나하나를 따라하며 극장에서 즐거워하던 내 바로 앞에 앉았던 노부부를 난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매니아층만 겨냥해서 이런 흥행을 할 순 없다. 물론 장정일의 사회비판적 텍스트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영화화한 장선우의 영화를 단지 야한 영화로 보고 몰려온 관객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친절한 금자씨>의 경우는 그것과는 다른 게 영화 속의 그런 풍부함이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주요한 전략이었다는 사실이다(이 영화의 경우 매우 바람직한 전략이었다는 생각이다.)

5.
근대 유럽에서 연극이 번창할 때.. 기본적으로 연극은 계몽의 도구였다. 책도 별로 대중적이지 않았고 신문의 연재소설이 이제 막 유행하기 시작할 무렵.. 사회의 엘리트들은 연극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이다. 여기서 '계몽'이란 대중들을 사회에 순응하는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조금은 부정적인 의미의 계몽을 말한다. 카타르시스와 감정이입을 통한 계몽.. 그런데 관객이 그런 종류의 연극을 보면서 한 인물에 빠져들게 되면 그 인물의 맥락, 즉 사회적인 구조하에서의 그 인물의 위치를 쉽게 잊어버리게 된다. 즉 "왜"라는 질문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브레이트가 반발했다. 브레이트는 연극을 관람하는 태도에 문제를 제기하고 '감정이입'을 거부하는 '소격이론'을 주장했다. 즉 연극을 보면서 일방적으로 감동받고 눈물짓는 것이 아니라 "이건 연극일 뿐이야", "작가의 의도는 뭘까"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조금이나마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론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일부 수준이 매우 높은 지식인들이야 지들끼리 수준 높은 이야기를 하며 브레이트류의 연극을 재미있게 볼 수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불편하고 재미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극을 그렇게 심각하게 보고싶어 하겠는가. 그리고 이전의 고전연극에서의 카타르시스는 뭘로 대신한다는 말인가. 연극보러 오는 사람들이 공부하러 오나? 웃고 울기 위해 오는 것이다.

6.
그럼 그런 관람방식의 대안으로 스포츠 관람을 생각해보자. 이건 재미도 있고 또 거기에 빠져들지도 않는다. 관객들은 스포츠 선수들이 실제로 전쟁하는 것이라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열광하고 즐기는 것이다. 좋은 스포츠 경기를 흔히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는데 스포츠 관람은 여러 모로 브레이트류의 연극의 성격을 많이 띄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고전 연극과 스포츠, 브레이트류의 연극의 가장 큰 차이가 관객의 개입정도다. 관객이 스포츠를 즐기려면 어느 정도의 전문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선수의 이름이나 경기규칙 등등..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관객의 지적요소(이성)가 스포츠 경기와 결합될 때 그 감동이나 재미나 감정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다는 것..
이건 영화관람의 유형과도 비슷하다. 영화에도 <엄마 없는 하늘아래>같은 눈물 짜는 영화도 있지만 <매트릭스>같은 브레이트류의 영화도 있다. 왜 [매트릭스]가 브레이트류의 영화인가.. <매트릭스>를 보면 이소룡의 무술도 나오고.. 다른 만화 등 여러 종류의 예술작품들을 많이 인용했다. 그런 인용이 관객이 스토리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소격효과를 내는 것이다. 또 동시에 그걸 즐기게 하고.. <매트릭스>같은 종류의 영화도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는 영화인 것이다. "감동 당할" 생각 말고 즐기려고 하면 된다. 그리고 즐기는 것도 일종의 감동이다.

7.
<친절한 금자씨>는 '거리두기'를 매우 적절하게 활용한 영화다. 솔직히 이렇게 유쾌하고 적절하고 관객참여적으로 거리두기를 한 영화는 난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스토리만 즐겨도 그다지 별 흠이 없는 영화다.
난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솔직히 <친절한 금자씨>란 제목에도 감탄했다.
이 영화 속의 대사 중의 하나..

"금자씨, 왜 눈화장을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  "친절해 보일까봐"

이 대사는 거리두기와 관련한 이 영화 전체의 전략을 말해주는 대사이기도 하다.

<친절한 금자씨>는 스토리상의 거리두기뿐만 아니라 촌스런 나래이션으로도 거리두기를 한다. 난 그 나래이션들을 들으며 영화에서 주로 흐르는 클래식 음악과 너무나 잘 어우러진다는 생각을 했고 또 그 나른한 분위기를 흠뻑 즐겼다. (이기본. 201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