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루치아역에서 직선거리로 친다면 걸어서 10분이 될까말까한 리알토 다리 (Ponte di Rialto)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아 두었지만 호텔을 찾아 헤매는 동안에 결국 해가 떨어졌다. 어느새 컴컴해진 좁은 골목사이를 이미 한 시간쯤 누비다가, 정말 기적같이 만난 관광객 아저씨가 유쾌한 목소리로 ‘어, 여긴 나랑 같은 호텔이군요’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그 미로 속같은 길을 헤매고 다녔을지 알 수 없다. 아저씨의 설명대로 돌다리를 건너듯 조심스레 골목 하나하나를 더듬어 가다보니 ‘Hotel San Cassiano (산 카시아노 호텔)’라고 쓴 작은 네온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도시에 꽤 익숙한 모습으로 걸린 알록달록한 네온 간판. 이 모습이 더욱 반가운 건 엇비슷하게 소박한 간판들이 내 걸린 골목길을 종로나 무교동의 뒷 길 어딘가에서도 본 적이 있음직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달랑 배낭 하나였지만 숙소에 떨쳐 놓으니 발걸음이 가볍다. 우선 가까운 리알토 다리부터 찾아 나섰다. 대운하를 가로 지르는 4개의 다리중 가장 유명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단다) 리알토 다리일 것이다. 사진엽서에서 운하위를 가로지르는 아치형의 석조다리와 그 곁을 유유히 떠다니는 곤돌라들을 보았다면 그건 틀림없이 리알토 다리를 배경 삼은 것일테다. 똑같은 자리에 처음 다리가 지어진 건 12세기라는데 대운하의 둑방을 따라 형성된 리알토 시장은 그때 이미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호황기을 맞아 동방에서 실어 온 갖가지 향신료와 비단등이 거래되는 동,서양의 물품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었다. 그리고 늘어나는 물자과 사람들의 이동을 돕기위해 그 자리에 다리를 세운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이 때의 다리들은 목조였던 탓에 400여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타거나 무너지는 사고로 모두 소실 되었다고 한다. 르네상스의 황금빛 햇살이 베니스 운하를 넘실대던 16세기, 똑같은 자리에 새로운 다리를 건설한 계획이 추진되었고 이 작업은 더욱 늘어난 물자와 사람의 안전한 통로가 되기위해 하중을 대폭 늘리는 것, 또 다리 밑으로 배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다리의 높이를 높이는 것등의 중요한 숙제를 안고 있었다. 당대 유명 건축인들 (미켈란젤로도 참여했다고 전해짐)과 벌인 입찰경쟁에서 낙점되었던 것은 안토니오 다 폰테라는 스위스 사람의 설계였고 초짜의 가당챦은 설계라는 처음 우려와는 달리 1500년대 말 완공되어 4백년이상 베니스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리알토 다리, 밤에 찍은 사진이 아쉽게도 없네.
다리 근처에 있는 리알토 시장
내가 도착했을 땐 밤이여서 그랬던지 다리보다 다리 양편으로 늘어서서 운하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불빛과 그 불빛을 받아 더욱 반짝거리는 물결들이 한층 아름답게 보였다. 일렁이는 물빛을 따라 늘어선 식당들은 저마다 호황이다. 흔하지 않은 경치를 에피타이져겸 디저트로 제공하는 셈이니 베니스를 느끼기에 안성맞춤. 흘깃 살펴보니 음식 가격은 만만챦다. 생각해 보면 꼭 리알토 다리 옆의 물가 식당이 아니더라도 베니스의 물가는 타 도시들에 비해 꽤 높았다. 아무리 섬같지 않게 생긴 섬이라도 프리미엄 얹은 섬물가가 반영되는가 보다. 살짝 실망스러운 건, 베니스의 음식 맛이 여타 이탈리아 도시에 비해 그닥 특출나지 않은 수준이었다는 것, 그래도 가격만큼은 이름 값을 하느라 경쟁도시들을 쉽게 따돌릴 수준을 유지하는 중이다. 이미 보통 때보다 한두 시간 늦은 저녁식사 시간이라 배꼽시계가 간절한 알람을 울려댔지만 어쩐지 근처에선 너무 요란한 첫 식사를 하게될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좀 더 거슬러 올라 가 보는 게 좋겠다.
도시 안쪽에 자리잡은 식당들이 더 조용하고 로맨틱함
어디를 가도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곳은 시장
베네치아는 잘 알려진대로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얻은 동방무역 독점을 통해 13-16세기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자리잡았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화려하고 독특한 정취는 동방과 서방이 오묘하게 섞어 빚은 하이브리드의 결과물처럼 보였다. 베니스가 르네상스의 중요 거점도시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역을 통해 얻은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포용력, 그리고 막강한 재력에 기댄 바가 컸다. 지금으로치면 홍콩과 비슷하지 않을까? 홍콩은 1,2차 산업이 전무하지만 오로지 무역을 통해 아시아 제 2의 경제부국이 되지 않았나. 몇해전 홍콩여행에서 만난 가이드는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어떤 물품도 홍콩으로 들어 오지 않는 것이 없고, 또 세계 어느 곳이라도 홍콩으로부터 물건을 사들이지 않는 나라는 없다라고 장담했었다. 중세 베네치아가 차지했던 무역도시로서의 위상은 오늘날 세계 최고 무역도시 홍콩에 눌리지 않는 것이었으리라.
산 마르코 광장, 밤
운하 옆 건물들
풍부한 물자, 무역도시 특유의 개방적 분위기는 유흥과 소비형태에도 반영됐을 것이다. 흔히 ‘베네치안 스타일’이라는 장식적 화려함의 진수는 사치와 향략를 추구하던 베네치아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엿보게 해준다. 수상버스를 타고 대운하를 따라가다 보면 양측으로 늘어선 고택들을 (현재는 대부분 개인주택이라기 보다 고급호텔이나 극장등의 용도지만) 구경할 수 있다. 특히 밤이 되면 등을 환하게 밝힌 고택의 실내에 반짝이는 샹들리에나 낡아서 살짝 퇴색됐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색감을 느낄 수 있는 비단벽지와 화려한 몰딩장식들이 얼핏얼핏 눈에 띈다. 400년전에도 지금 내가 보고있는 저 창문으로 샹들리에 빛은 새고 파티족들의 흥을 돋우는 음악소리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화려한 밤 연회를 누비던 카사노바의 발길이 닿은 곳마다 어찌 연애가 꽃피지 않았겠는가. 그 시절을 살던 사람들에게 인생은 즐기기만 하기도 짧고 벅찬 것이었을지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광경이 운하를 따라 계속되지만 문득문득 공허한 바닷공기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빛은 지나간 시간들이다.
베네치아 관련서적들이 가득 찬 서점
카사노바, 옆 얼굴만 봐서는 그닥 치명적이지는 않네 ㅋ
베네치아는 어떤 여행지 보다도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열 손가락안에 꼽히는 여행지이기도 하지만 명소들에 좁은 도시안에 밀집되어 있다보니 어디를 가도 관광객들을 피할 수는 없다. 수학 여행단, 단체 깃발을 휘날리며 시간에 쫓기시는 중년의 아저씨, 아주머니들, 또 관광객들의 느슨해진 주머니를 노리는 정체모를 국적의 호객꾼들이 어디를 막론하고 나타났다. 나처럼 한가함을 쫓는 여행객들이 도시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기엔 훼방꾼들이 너무 많다고나 할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도시 베네치아는 줄어드는 도시 인구로 골머리를 앓고 있단다. 비싼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해 도시를 떠나는 토박이들이 매년 늘고 있어서 이제 베네치아에는 사람보다 비둘기나 쥐가 더 많이 산다고 자조섞인 농담이 돌고 있다고. 내가 거리에서 만난 무수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나 같은 떠돌이들이었겠구나 생각하니, 신비로운 물위의 도시가 어느날엔가 사람사는 냄새가 나지않는 그저 거대한 박물관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닌지 쓸데없는 걱정이 든다.
두칼레 궁전 측면
곤돌라와 사공들
도시에 애잔함이 잦아드는 때는 밤이다. 바쁜 일정에 지친 사람들이 모두 저마다의 숙소를 찾아갈때 쯤, 번잡하고 화려해 보였던 산 마르꼬 광장 (Piazza San Marco)에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무리를 지어 다니던 관광객들이 빠진 자리에 단촐히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눈에 든다. 달은 구름에 가렸지만 광장을 밝히는 가로등 너머엔 흐린 달빛이 광장 곁을 감싸는 아드리아해의 잔잔한 파도와 둥근 성당 지붕들을 푸르게 물들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광장에 테이블을 내고 밤 산책 손님들을 맞는 카페에선 현악 3중주단이 연주를 들려준다. 밤의 고요를 빌어야만 비로소 가치를 발하는 연주지만 가끔은 이쪽 저쪽의 카페에서 각각 연주되는 음향들이 부딪히며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어 안타깝기도 하다. 공간에도 늙음이란게 있다면 나는 베네치아에서 그 늙음을 보는 것 같다. 이미 백발이 된 완숙한 노년이 아니라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떠나가는 젊음에 우울해하는 한 시절의 미인같은 모습이랄까? 어쩐지 안쓰런 마음을 일으키는 피로한 얼굴, 그렇게 베네치아의 밤풍경을 바라보았다.
후회의 다리,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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