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동양화처럼 고즈넉히 안개가 내린 코모호수를 아쉬움 속에 떠나야 했던 이유는 미리 끊어 둔 베네치아 행 열차표 때문이었다. 오후 5시 40분 베네치아 산타루치아역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 기차는 짧아진 해가 저물기 전에 숙소를 잡아야 한다는 노파심에 서둘러 구입해 둔 것이었다. 일행이 없는 여행이라면 어디에 머무르고 어느 곳에서 언제 떠날 것인가로부터 한결 자유롭겠거니 싶지만, 의지할 동행이 없는 홀로 여행길에서 늘 갖게 되는 마음 한 켠의 두려움은 낯선 시간 과 공간에 불쑥 혼자 떨어지게 되는 일이다. 혼자 여행의 즐거움이 고독과 낯설음으로부터 오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면 모순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즐길만한 고독은 어느만큼 계획되고 예정된 것이어야 한다. 나약한 인간의 본능은 안전과 안락함에 대한 위협에 맞닥뜨리면 모든 정서를 지금 처한 불안의 극복이라는 과제아래 통제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때부턴 더 이상 즐겁지 않은 여행이 되기 십상이다.
밀라노에서 출발해서 고속열차를 타고 2시간 반쯤 지났을 무렵, 큰 호수인지 바다인지 모를 풍경에 둘러 싸여 있다면 고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간 요나처럼 당신도 베네치아의 입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음이다.
바다를 가로질러서 산타루치아역으로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에서 빠져 나오면 바로 이런 광경
혹시 아래 로고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나? 물고기 모양의 로고는 위에서 내려다 본 베네치아를 형상화 한 것인데 베네치아는 정말이지 딱 저렇게 생겼다. 빨간 눈이 표시된 부분이 내륙과 연결된 선로가 끝나는 산타루치아 역이고 눈알 바로 옆에서 시작되는 가장 굵은 흰 선은 도시를 관통하는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대운하 (Canal Grande)를 표시한다. 기차역을 빠져 나오는 순간 여행자는, 표현 그대로, 베네치아라는 큰 고래의 뱃속으로 빨려들어 가게 된다.
물 위에 지은 도시 베네치아의 기원은 사실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그나마 많은 역사가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가장 일반적인 주장은 운명을 다해가던 서로마제국의 (서기 5세기 무렵) 시민들이 훈족의 침입으로부터 피난처를 찾는 데서 시작되었다는 것이지만 이들이 이주하기 전부터 원주민에의한 도시가 존재했다는 보고도 있다. 누가 도시의 뼈대를 만들었건간에 갈대숲만이 무성했던 외로운 섬들과 빈 뻘이 야만적인 살육과 약탈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안전지대였음을 상상할 수는 있다.
"아틸라의 포악한 오만무도함은 극에 달하여 그의 말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야만스러운 파괴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유럽의 한 공화국의 기초를 닦게 되는데 그 나라는 봉건 시대에 상업의 기술과 정신을 부활시켰다. (중략) 훈족의 칼을 피해 도망친 아퀼레이아, 파두아, 인근 마을의 많은 가족들은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근처 섬으로 숨어들었다. 아드리아 해 만의 조수 간만은 아주 약했고, 그 끝에는 백여 개의 섬이 대륙과 얕은 물을 사이에 두고 육지의 긴 단층 몇 개로 파도를 막고 있었다. 숨어 있는 좁은 해협들을 통해서만 선박들이 드나들 수 있었다. 5세기 중반까지 이 멀고 외진 지역은 주민도 거의 없고 이름도 없이 경작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상황에 처한 베네치아의 피난민들은 관습과 기술, 정부 체계를 서서히 만들어 나갔다."
에드워드 기번 - 로마제국 쇠망사 35장
너무나 촘촘해서 빈틈이라곤 없다
앞집에 놀러 갈래도 배가 필요하지는 않은지...
어떤 작가는 길을 잃어도 행복할 것같은 도시로 베네치아를 꼽았는데 어쩌면 그의 말은 베네치아 여행자가 가져야 할 최소한 마음의 준비라고 바꿔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한참 어슬렁거려도 동서남북이 명확한 여느 도시들과 달리 이 곳은 산책자의 공간감각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마는 실타래같은 골목길이 2천여개에 달하니까 말이다.
쓰레기 치워가는 배
사람하나 통과할 골목 길
수상택시나 곤돌라를 이용하면 꽤 깊숙한 동네 안쪽까지 물길을 따라 찾아갈 수 있지만 값비싼 요금이 항상 문제다. 뭍의 버스나 전철같은 역할을 하는 건 바포렛또 (Vaporetto)라는 수상버스인데 대운하를 거슬러 오르락 내리락 하는 노선이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있다. 그러나 물위를 ‘달린다’는 기대는 접어두는게 좋다. 3.8Kim 운하를 통과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이 약 40분 이라고 하니까 단순계산으로 배는1분에 미처 100미터도 못 나아가는 꼴이다. 실제로 그 정도 느림보는 아니었지만 배가 부두에 닿을 때마다 승객들이 타고 내리는 데 대부분의 시간이 소요되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30초마다 가다 멈췄다를 반복하는 드라이브 길이지만 마치 베네치아 주민이 된 것처럼 바포렛또의 노선및 운행시간표와 친숙해지길 권하고 싶다. 잊지말자. 베네치아는 하나인 것처럼 위장한 섬들의 군락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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