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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법원에서 시간 때우기

고대 아테네에는 디카스타이 (Dikastai)라는 재판절차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재판 당사자가 자기 이익에 따라 배심원을 선택할 수 없도록 고안된 장치로 일반 재판의 경우 아테네 시민을 501명 (살인등 주요 범죄는 1,001명)이나 배심원으로 선발했다고 한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이아의 3부격인 '에우메니데스'는 디카스타이 재판 과정이 소개되기도 했는데, 이 극에서 재판관이었던 아테나 여신은 12명의 디카스타이를 선발해 기소된 오레스테스에 대한 판결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이는 현재 배심원 재판재의 원형이 되었다.

 

얼마 전 배심원 의무 소환장(?)이 날라왔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우편물 겉면에서 '...세무서', '...법원' 이런 단어를 찾는 순간, 내용물을 확인하기도 전에 마음부터 무거워진다. 죄 짓고 사는 것도 아닌데 이럴 때 보면 공권력에대한 개인의 피해의식은 이미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이 된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지역내 최고 법원에서 발송된 소환장에는 굵은 글씨체의 대문자로 "YOU ARE SUMMONED TO REPORT AS A JUROR ON THE DATE SHOWN ABOVE (아래 날짜에 당신을 배심원으로 소환합니다) ".라고 알려준다. 굵고 진한 글씨는 어디나 그렇듯 매우 주요한 사안이나 문장에 밑줄을 긋는 것과 동일한 역할을 하지만 대문자는 관습적으로 조금 다른 의미도 포함한다. 특히 편지나 문자로 대화할 때 대문자로 모든 문장을 쓴다면 상황에 따라 명령이나 윽박지르기, 소리치기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의미는 다르지 않지만 대화를 할 때 거친 감정이 실리는 부분을 반영한 게 바로 대문자로 쓴 문장인 것이다. 법원에서 나에게 감정실린 소환장을 날릴 이유는 하등 없지만, 읽는 나는 무겁게 깔린 압박을 느낀다. 

 

미국에서 배심원 재판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권리이자 의무인데, 절차적인 문제점을 비롯한 비판이 계속 되어왔어도 건국이후 유지되어 온 미국 사법시스템을 이루는 중요한 축이다. 사실 미국의 헌법정신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정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영국 식민지 당시, 영국은 자국에서 배심원 재판제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선 이를 금지했다고 한다. 부패하고 차별적인 식민정부의 사법부 관행에 절망했던 건국준비위원들은 그래서 배심원 재판을 건국의 중요한 필수 과업으로 고려했던 것.

 

한국에서 예비군 소환장을 받으면 비슷한 기분일까? 소환장을 받는 순간 숨겨져 있던 몸속의 귀챠니즘이 한 번에 솟구쳐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미간이 자동으로 찌푸려 진다. 피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하면 그럴 듯한 이유로 피해갈 순 없을까 싶어지기도 하고... 사실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는 않다. 귀챠니즘의 선봉에 있는 이민자들은 대개 '영어 못해'라고 엄살을 떨거나 노약자들은 지병을 이유삼아 소환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의무이긴 하지만 개인의 삶도 중요하기에 법원도 비교적 융통성있게 사정을 고려해준다. 물론 어떤 핑계를 대거나 내세운 핑계의 진정성등은 모두 개인의 문제다. 

 

소환장이 날라 왔다고 바로 배심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환된 날, 법원의 배심원 대기실에는 적어도 (지역차는 있지만) 수 백여명의 예비 배심원들이 모여서 판사의 콜을 기다리게 되고, 판사는 주어진 명단에서 수십에서 백명 정도의 예비 배심원을 담당 재판에 호출한다. 사건별로 꼼꼼한 배심원 선별 프로그램에 따라 15~20여명이 추려질 때까지 이 과정이 계속된다. 판사의 배심원 선별 기준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중요 기준 중의 하나인 중립성은 대개 판사와의 짧은 개별 면담으로 판단된다. 이 때문에 미국인들 사이엔 일반적인 루머가 있는데 귀찮은 배심원 의무를 피하는 방법으로 판사와의 면담을 이용하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자나 아이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거나, 정치나 권력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든지 하는 식으로 '나는 비뚤어진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풍기면 배심원이 될 가능성은 0%이 될 것이다. 겪어보니 이런 극단적인 케이스는 소문처럼 무성하지 않을 것 같다. 일반인들이 재판정에 서면 '법'이라는 관을 쓴 판사의 권위에 눌려 ~척 연기를 한다는 게 쉽지않기 때문이다.

 

이틀 동안의 소환기간은 기다림을 배우는 시간이다. 가끔 판사의 호출에 재판정에 서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틀 동안 그저 기다리다 기다리다 만을 되풀이 하고 돌아 오는 경우도 있다. 두꺼운 책도 준비하고 음악을 들으며 지루한 기다림을 달래보기도 하지만 기다리는 것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약속이 벌처럼 느껴지는 시간이다. 난 이번에도 배심원 선별에서 다행히(?) 놓여 났다. 두번 째날 저녁 법원을 나서는데 어렵게 번 돈 함부로 쓰지 말라는 친구의 장난스런 문자가 왔다. 예비 배심원은 하루에 5달러 봉사료를 받는다. 에효~ 이틀 주차료만 50달러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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