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는 존경할만한 정치인인가
김구의 결정적인 정치 역정에 대해, 팩트를 중심으로 간단하게 살펴보자.
1. 1946년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
여기에 대해 김구는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로 맹세합시다"라고 외쳤다.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서중석/역사비평사/1991년-'《대한민국 소통법》, 강준만'에서 재인용) 이 발언을 보면 김구는 진보주의자도 통일주의자도 아니다. 김구는 1876년생이고 당시 김구의 나이는 70살이었다. 철없을 때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2.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 미소 관할 지역(남북한 지역) 독자적 선거 채택
보름 후 11월 30일, 여기에 대해 김구는 이승만과 한 시간 정도 면담한 뒤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의견 차이가 없다며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냈다. 그러나 이틀 후 12월 2일, 장덕수가 암살당하고 김구는 자신이 배후로 의심받자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김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는 아주 교활한 답변으로 대응했다. 이에 분노한 김구는 그제서야 이승만과 결별했다.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이승만 김구 시대의 정치사》, 도진순/서울대학교출판부/1997년-'《대한민국 소통법》, 강준만'에서 재인용)
3.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
김구는 원래 우익지도자였으나 위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하고 좌우를 초월하는 민족주의자로 포장됐다. 즉 정치적 이해득실을 이유로 자신의 이념 브랜드를 순식간에 교체했던 것이다. 이에 우익들이 김구를 거세게 공격하자 김구는 4월 19일 뜬금없이 북한으로 간다. 이때 김구가 했던 말이 그 유명한 "38선을 베고 죽을망정 가야 돼!" 다. 그리고 5월 5일, 별 성과 없이 남한으로 돌아온다. 또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를 전면 거부함으로써 보수세력이 선거에서 독식하게 했다. 물론 명분은 남북한 분단 반대였지만 과연 기초적인 명분과 실리를 챙긴 행동이었는지 의문이다. 여기에 대해 정치학자 최장집은 "급변하는 사태의 복합적 국면을 이해하고 이에 대응하는데 김구 만큼 더디고 효과적이지 못한 지도자는 많지 않다"는 평가를 내렸다. (《한국의 국가형성과 민주주의》, 정해구 – '《대한민국 소통법》, 강준만'에서 재인용)
김구는 전형적으로 과대평가된 정치인이다. 사실 학계에서는 다 아는 상식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좌우파 이념 공세가 심한 나라이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대충 김구 같은 사람을 존경한다고 하면 문제가 없다. 조봉암, 장준하를 존경한다고 하면 곧바로 빨갱이 논쟁에 휘말린다. 노무현도 정치 시작 초기에 김구를 거론했으나 이후 링컨이나 빌리 브란트 같은 정치인을 주로 인용했다. 그만큼 우리나라엔 사상적 전범으로 삼을 정치인이 없기도 하거니와 있어도 거론하기조차 힘든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