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Lost in Translation in Milan

반항아 2013. 12. 27. 02:46
밀라노 얘길 쓰다보니 문득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밀라노에 도착한 첫 날 저녁, 두오모 성당 지붕에서 야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해서 두오모 성당이 있는 광장으로 갔었다.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지붕입장객에게 표를 파는 매표소가 이미 문을 닫은 후였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고 차선책으로 성당 바로 옆에 있는 르네상스 백화점쪽으로 돌아섰다. 이 백화점 꼭대기 층에 그닥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의식당가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꿩대신 닭이나 삼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근데...웬걸,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때 마침 백화점 옥상에서 쏼라쏼라하는 구호와 함께 붉은 글씨를 휘갈긴 플랭카드가 우두두 펼쳐지는게 아닌가?


어쩐지 익숙한(?) 광경이다 했더니 시위대가 옥상을 점거하고 주장하는 바를 시민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찰나였던거다. 광장은 평일에도 사람으로 넘쳐나는 곳인데다가 토요일 저녁이라 그야말로 인산인해였으니까 깜짝시위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 타이밍이었다. 발디딜 틈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에 갇혀 나도 시위대의 구호소릴 듣게 됐는데 당연히 무슨 뜻인지 알리가 없지 않나? 호기심이 발동해서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어로 뭐라고 하는 거냐고 물어 보았는데 앞에 선 20대 청년들도, 옆에 선 여자도, 뒤에서있는 중년 부부도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까막눈들 여행객들이었다. 영어로 독일어로 서로가 서로에게 혹시 이탈리아어 아는 사람없냐고 묻고 있는 어이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죽일놈의 호기심때문에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다니며 여러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도대체 시위대가 왜 시위를 하는지, 그들이 옥상까지 올라가 외치고 있는 말이 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흠...다행히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건물을 에워쌓았을 무렵 시위대는 짧은 연설을 마치고 스스로 물러나는 듯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때까지도 이 시위의 의미를 아는 사람을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시위대가 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허망했을까.

"나 지금 누구랑 얘기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