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본 영화읽기

<와호장룡> 여성영화

노유주 2015. 11. 15. 18:23



1.
양가집 딸 장쯔이는 어릴 때부터 착실히 검술연습을 하여 고수의 경지에 오른다. 장쯔이의 스승은 파란여우라고 불리는 여자악당인데 어느 순간 장쯔이는 자신의 검술실력이 스승을 능가했다는 걸 알게 된다. 장쯔이는 그 사실을 깨닫고 “눈 앞이 캄캄해졌다”고 고백하면서 “이제 누가 날 이끌어주지”라며 탄식한다.
이때 강호에서 존경받는 초절정고수 주윤발이 동료 양자경과 함께 나타난다. 우여곡절 끝에 자기 손에 들어온 강호의 전설적인 보검 ‘청명검’을 지역유지에게 맡기기 위해서다. 이 청명검은 현실에서의 어떤 절대가치를 상징한다.
이 때 스스로 절망과 권태에 빠져있던 장쯔이는 기회를 잡아 주윤발이 보관하고 있던 청명검을 훔친다. 그런데 주윤발은 장쯔이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검을 돌려 달라고 함과 동시에 자신의 후계자가 되라고 장쯔이를 설득한다. 하지만 장쯔이는 주윤발을 거부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영화를 보는 내내 장쯔이가 주윤발의 제자가 되면 만사형통일텐데 왜 저리 성격이 모났을까? 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장쯔이는 주윤발을 왜 거부했을까? 장쯔이는 기존의 남성 가부장 질서가 싫었던 것이다.

2.
장쯔이는 한때 사랑을 쫒아 (여성의 사랑을 상징하는 ‘빗’을 되찾겠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사막의 산적들과 다구리를 뜨기도 한다) 산적두목과 연애를 하기도 했고 서예 등 신부수업을 하며 부모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도 준비해 봤지만 별 미련없이 다 때려 치운다. 그리고 절대가치의 상징인 청명검을 들고 험난한 출가길에 오른다.
장쯔이는 여자의 허위의식이란 멍에 따위는 애시당초 벗어던지고 더 나아가 남자의 성공을 상징하는 주윤발까지 거부한다. 그것은 장쯔이가 주윤발이 지키고 있는 기존의 질서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기껏 주윤발처럼 강호 최고수가 되어 봐야 관리나 지역유지들의 화물운반 보호책임자같은 역할 밖에 할 수 없음을 장쯔이는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주목할 건 주윤발의 그 역할에 따른 일도 정작 주윤발을 사모하고 남자에게 목 매달고 있는 캐릭터인 양자경이 주로 하는 것이고 정작 주윤발은 일은 안하고 늘 싸돌아 다니면서 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주윤발은 딸 같은 장쯔이에게 흑심까지 품고 있다. 대나무 숲 결투에서 장쯔이를 바라보는 주윤발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눈치 빠른 체제 순응주의자 양자경은 주윤발에게 "갑자기 뜬금 없이 웬 후계자 타령이냐"며 노골적으로 장쯔이에 대한 질투를 드러낸다. 결국 영화 후반부에서 장쯔이는 동굴까지 자신을 찾아온 주윤발에게 “원하는게 저예요 이 칼이예요?”라고 반문하며 주윤발의 흑심까지 꿰뚫어 본다.

장쯔이는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청명검을 매개로 뭔가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청명검은 장쯔이에게 그것을 찾아주지 못한다. 결국 장쯔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적 한계가 문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초월하려 하는 장쯔이같은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는 이 세상과의 타협 불가능한 고뇌가 문제인 것이다. 우리의 사랑스런 장쯔이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이끌다가 결국 자신이 찾던 그 무엇이라는 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깊이 절망한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이해하지는 못하는 옛 애인의 애절한 사랑과 눈물을 뒤로 하고 大自然에 몸을 던진다. ㅠㅠ

덧붙이는 말.

이 영화에서 재미 있는 장면 중 하나...
장쯔이가 주막에서 온갖 남자 양아치들과 다구리를 뜰 때 장쯔이는 첨엔 선방을 날리는 놈에 맞서 앉은 채로 한 손으로 상대한다.
이건 주윤발이 이전에 한 손 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걸 흉내낸 것이고 주윤발로 대표되는 남성권력에 대항하는 깨인 여성 특유의 자존심과 건방의 표현이다. 결국 장쯔이는 힘에 부쳐 일어서서 양아치들을 제압한다. 그리고 장쯔이의 첫 스승이 여성이고 나중의 극복대상은 남성이라는데 주목하라. 이 영화의 많은 세세한 장치들을 보면 이 영화가 여성영화임을 확신할 수 있다. 


(by 이기본. 201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