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대만 입법원이 점거당한 이유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3. 20. 00:06








기습적인 대규모 시위

어젯밤(18일) 대만 학생운동단체 소속 대학생과 활동가 등 200여명이 입법원(한국의 국회 기능) 본회의장을 기습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의 저지선은 격렬한 몸싸움 끝에 무너졌다. 입법원 본회의장이 외부의 운동 세력에게 점거 당한 것이다. 대만 헌정 사상 최초의 일이다.

* 위 사진들은 방금 대만 현지 뉴스 보도를 촬영한 것이다. 점거 시간을 카운트하며 생중계 중이다. 학생들의 입법원 점거 당시 사진은 야후 대만(클릭)을 통하면 된다.


입법원 내부만 점거 당한 것이 아니다. 일반 시민들의 근로 시간대에는 약 2000여명의 대학생들이 입법원 주위에서 자유 발언 등으로 시위를, 퇴근 시간 이후(현재)에는 일반 시민들까지 동참해 시위대의 규모가 확대일로에 있다. 방금 현지 보도에 따르면 입법원 뿐 아니라 총리관저 주변도 시위대에 장악 당했다. 또한 제2도시인 가오슝(高雄)에도 기천명의 시위대가 모여 집회를 시작했다. 학생 시위대 및 제1야당인 민진당은 21일까지 시위를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 선포한 상태다. 대만 정부 및 경찰은 총통부, 입법원 등 주변 경비를 강화하고 해산을 촉구하고 있으나 시위대와 민진당은 오히려 21일 대규모 시위를 예고했다.

한 나라의 국회 본회의장이 야당도 아닌 외부 운동세력에게 점거 당한 초유의 사태는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 현지에서는 경찰의 경비 전략보다는 시위대의 기습적인 전략을 그 첫째 이유로, 그리고 예상 밖의 '거대한 호응'을 둘째 이유로 들고 있다. 거칠게 표현하면, 대만 사람들이 몹시 '빡쳤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빡'치게 했을까.


언론에 보도된 경찰의 입법원 경비 전략



대만-중국 서비스무역협정

이번 시위는 집권 국민당이 지난 17일 입법원 상임위에서 야당 소속 의원들과의 몸싸움 속에 일방적으로 중국과의 서비스무역협정(중국어로는 服务贸易)비준 절차를 강행하려 한 것이 발단이 됐다. 비준 절차를 강행하려 했다는 것은 대만-중국 간 협정은 이미 성사됐단 뜻이다. 대만과 중국은 지난해 6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제9차 고위급 회담을 열고 2010년 체결된 양안 경제협력기본협정(ECFA) 후속조치로 전자상거래, 금융, 의료, 통신, 여행, 운수, 문화창작 등 서비스 산업분야 시장 상호 개방에 합의했다. 이에 따르면 중국은 80개 항목, 대만은 64개 항목의 서비스 산업을 상호 개방한다.

그러나 야권은 대만 경제가 '중국 종속'을 가속할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야당 민진당은 이 협정이 발효되면 1천여 개 이상의 산업과 수백만 명의 대만인들이 직접 타격을 받을 것이라 주장했고 이에 다수 대만인들은 동조하고 있는 추세다. 대만 정부가 공청회 등을 통해 이번 협정에서 대만이 더 큰 이익을 얻을 것이란 정부 추계를 발표했고, 이미 중국 대륙 시장이 제1시장인 다수 대만 기업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다. 그러나 GDP의 71%가 서비스업 시장인 대만 일반의 입장에서 거대 중국의 진격은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과의 협상(작년)부터 비준 과정(올해 초)이 제대로 공개 되지 않은 것이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된 것이다.



한·미 FTA와는 다르다

위 내용만 살펴보면 노무현 정부 말기부터 이명박 정부 초기 광화문 일대를 촛불로 뒤엎게 한 '한·미FTA'가 연상될 것이다. 협정 품목이 다르나 협정의 성질과 반대 논리 등이 매우 유사하다. 또한 이번 시위 일체를 올해 11월의 지방선거 및 2016년 대선을 염두에 둔 야권의 한 수로 분석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단순히 '협정' 자체를 두고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는 양안 관계의 특수성 및 최근 대만인들의 정체성과 경제 인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동했다. 상당 기간 누적된 정체성 변화와 위기 의식이 이번 협정의 '내용'과 '절차'를 도화선 삼아 폭발한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대만의 인구 구성과 현대사를 짧게 살펴보자. 우리는 흔히 대만을 국공내전에서 패배하고 섬으로 도망 온 장개석 일당의 국가로 이해한다. 하지만 실제 장개석 및 국공내전 이후 대만으로 넘어온 사람들(외성인外省人)은 대만 전체 인구의 약 15%(1990년 기준 13.3%)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인구는? 소수의 원주민(고산족 및 평지족)을 제외한 나머지 인구는 대부분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부터 대만으로 이주해 온 선이주민(본성인本省人)이다. 그리고 이들은 일본 패망 이후 독립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일본이 패퇴한 이후 독립에 열광하고 보다 나은 생활을 염원했던 대만 선이주민은 국민당군의 대만 진주 이후 큰 실망감에 휩싸였다. 같은 민족인 국민당군의 정책 및 대선주민 태도가 일본보다 훨씬 더 포악했던 것이다. 당시 이를 두고 유행했던 "개가 떠나니 돼지가 왔다"란 한 마디가 그들의 여론을 대표한다. 결국 국민당의 폭압적 정책은 선이주민의 반발을 불렀고 그 와중에 국민당군은 1947년 2.28일부터 약 한달에 걸쳐 선이주민을 약 3만명(정확한 수는 아직 집계되지 않았음)을 학살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대만을 장악한 국민당은 1987년까지, 약 40년간 '감란시기戡亂時期'라 불리는 계엄령으로 통치했다. 

이후 장개석의 아들인 장경국이 리덩휘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함으로써 대만은 민주화를 쟁취했다. 이 때 리덩휘는 대중국 유화정책을 제시했고, 이에 반발한 '중국 수복론자'들이 나가서 '신당'을, 그리고 반국민당/반중국을 표방하며 '타이완 저에성'을 주장한 선이주민(본성인)들이 '민진당'을 창당했다. 이런 격변의 시대에서도 국민당이 이후에도 총통을 배출하고 다수당의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40년이란 짧지 않은 계엄령 통치기, 그들은 엘리트를 육성하고 사회 곳곳의 요직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 뿐만은 아니다. 국민당은 과거에 대한 반성 및 타이완 정체성의 존중을 드러내고, 타이완 국민들을 일정 부분 만족시키는 경제적 성과도 도출했다. 여기에 민진당의 자충수를 들 수 있다. 본성인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최초의 비국민당 총통이 된 민진당 출신 천슈이벤의 부패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이 부패에 대한 민중의 실망감 역시 국민당에 대한 비적극적 지지로 전환됐다. 하지만 다수 대만인들은 '정치적 지지'와 '실질적, 정서적 지지'를 구분한다. 특히 양안 문제에 있어서는 말이다.

*1987년이란 시기, 차기 지도부가 독재 지도부의 심복이면서도 절차적 민주주의를 동의했다는 점, 정계개편을 유도했다는 점 등 한국과 대만의 민주화는 형태상 유사점이 많다.


대만과 중국의 상호 방문이 거의 자유로운 오늘,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던 '외성인'들마저 '타이완적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최근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중국 대륙'의 혈통을 가진 외성인 50% 이상이 스스로를 '대만인'으로 인지하고 있다고 한다. 고향을 방문할 수 있고, 고향의 사람들이 대만으로 와 접촉의 장이 넓어진 게 이 정체성 변화의 주요 원인이다. 냉정하게 말해, 대만의 많은 이들은 점점 '중국인'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만인의 심상지리(心象地理)의 실상이다.

이번 서비스경제협정이 한·미 FTA와 다른 핵심적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협정의 핵심은 '사람' 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사람의 자유로운 거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대만의 현재 실업률은 이미 한국보다 높고, 대학 진학률은 한국만큼 된다. 그런 가운데 유사 문화권, 유사 언어, 약 70배의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의 인간들이 자유로이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공포다. 한국이 200만도 채 되지 않는 조선족을 노동시장에 어떻게 편입시키는가, 혹은 편입된 노동력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를 두고 골머리를 앓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대만의 복잡한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대만인'으로 설정해 나가고 있던 대만의 다수는 지금 '거인의 진격'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실제 '경제적 이익'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는 '중국 대륙'으로 나가 경제적 이익을 얻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 그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바로 중국 대륙의 사람이다. 상품은 팔고 싶으나 사람은 받고 싶지 않은 것. 그러니 서비스무역협정은 최근의 대만에 있어 일종의 역린(逆鱗)인 셈이다.



시위 현장

시위의 주력은 두 군데다. 입법부와 외교부의 중간 도로와 입법부 정문이다. 모두 시민들 및 운동가, 교수, 행인, 아르바이트생 등 자유발언으로 시위를 진행 중이다. 그들이 말하는 내용 몇 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인을 대륙인이라 부르지 마라. 그들은 중국인, 우리는 대만인이다.

중국은 대만을 정치경제적으로 침탈하고 고립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런 식이면 20년 뒤, 내 후손들은 모두 중국인이 될 것이다.

정부가 협정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렇게 비민주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이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다. 대만은 민주국가다. 중국이 아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어머니들


시위 지원 본부대


경청하는 시민들

자유발언자 중 누군가가 "대륙" 운운하자,

"대륙은 없다! 그들은 중국! 우리는 대만이다! 발언 수정하라!" 고 외쳤던 할머니


자신을 15살 때부터 아르바이트만 해왔다고 소개하고,

협정 이후 몰려올 중국인들을 어떻게 감당해 낼 것이냐고 묻고 있는 일반 시민



입법부 측면엔 오래된 교회가 있다.

시위에 참가한 노인들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이곳에서 잠을 잔 학생들


입법부 측면에 줄지어 서 있는 중계차량


앉은 자리에서 반협정 포스터를 생산하고 있는 일꾼


경비 중인 경찰들


단상 앞에서 경청 중인 군중




외교부 청사


환호하는 청중들


한 미국인 교수의 일갈, 

"당신네 정부들은 재벌만을 대표합니까!"

옆의 여성은 통역 중. 그러나 나를 제외한 대부분은 저 여자가 통역 하기 전에 이미 박수를 쳤다.

아무래도 시위 주역이 대만 제1대학인 '국립대만대학교' 학생들이라 영어를 잘 하나 보다.



연설 중인 한 시민의 뒷모습




시위 지원 천막








여기서부터는 본회의장을 점거 당한 입법원(국회) 사진이다. 현재 경찰들이 입구를 막고 진입을 막고 있다. 본회의장 내부에는 '에어컨'을 틀어 달라는 시위 속 시위 중이다. 현재 대만의 낮기온은 이미 30도를 상회하고, 습도는 90%를 넘는다. 입법원 정문 앞 시위는 보다 농밀하다. 단상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부산한 입법원 근처


발 디딜 틈이 없다


입법원 정문을 막아선 경찰, 그 앞에서 자유발언 중인 대학생들



마이크 잡은 남자가 시위 진행자다


자신을 학교 선생이라고 소개한 이 여성은 

자신의 두 아이를 위해서 나왔다고 했다

이 여학생들은 대만 남부에 살고 있는 학생들이다.

어제 저녁 비준 강행 뉴스를 보고 시위하기 위해 새벽 열차를 타고 타이베이로 왔다고 했다















경청하는 시민들, 촬영하는 시민들, 분노하는 시민들


입법원의 대만 국기



한 국립대 교수의 일갈

어제 시위가 발생한 사실은 알았지만, 일이 이토록 커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거주하는 곳이 타이베이 외곽의 한 산속이라 중심의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없었다. 그러다 오늘 아르바이트 하는 대학 수업 지원 강의에서 이 사태와 관련된 대만인의 '정서'를 알게 됐다. 그래서 현장에 가 본 것이다.

오늘 내 아르바이트 장소인 교실에서, 대만 모 대학의 모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의 사진을 빔 프로젝터에 띄우고 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 됩니다"란 문구를 중국어로 번역해 사진 아래에 표시해 뒀다. 무슨 일인가 하고서 그녀를 봤다. 그녀는 차분히 이번 협정과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국과의 이번 협정이 취업난에 시달리는 너희들은 더 힘들게 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이니 모른다고 하자. 그러나 정부는 협정 체결부터 비준 과정까지 철저하게 국민을 기만했다. 그 어떤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다. 협정 체결이야 정부 주관이라고 하자. 하지만 입법원은 국민의 민의를 담는 곳이다. 야당인 민진당도 계속해서 정보 공개를 요구했으나 그들은 강행 비준을 시도했다. 지금 대만이 세계에, 중국에 자랑스러운 게 뭐가 있느냐? 경제? 이미 한국에 역전당했다. 우리보다 더 잘 사는 나라가 수없이 많다. 우리의 자랑은 '민주'였다. 그런데 이번에 정부는 우리의 자부를 건드렸다. 지금 수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입법원에 나가 밤을 세고 있다. 여러분, 나가서 그들을 격려해라."







현 시점, 더 많은 이들이 시위 현장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번 협정의 최종 비준 여부, 그리고 그 협정이 대만과 중국에 미칠 영향 등에는 큰 관심이 없다. 냉정하게 말해 대만의 원심력은 특단의 조치와 기적같은 동아시아 국제정치환경의 변화가 없는 이상 중국의 구심력에 한 걸음, 한 걸음 잠식 당해 갈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자신들의 이익과 생존을 도모하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오히려 학생들, 그리고 시위 현장에 나온 또다른 교수들, 또한 입법원 점거를 막다가 의식불명에 빠진 한 경찰 책임자의 가족, 여야당의 일부 정치인들이 서로 앞다투어 "이번 싸움은 경찰과 학생의 싸움이 아니다. 입법원이 협의하고 합의해야 할 문제다. 당신들의 성실하지 못한 업무 이행이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있다!" 고 말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언론과 현장 모두에서 느낄 수 있는 대만인들의 사뭇 냉철한 사태 분석, 어쩌면 이게 대만의 진짜 힘인지도.



현장, 현 시각(00:05), 섭씨 26도의 타이베이에서.